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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생각

 

십오 년이 흘렀다. 이제는 어엿한 직장인이 되어 내 이름으로 된 차 한 대 정도는 몰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그런 어른이 되었다. 이미 끝까지 닫혀 있는 창문이었지만 동그란 손끝을 걸어 버튼을 죽 당겼다. 창문 유리가 한 번 더 툭 하고 묵직하며 뭉툭한 소음을 내며 차 안을 완벽하게 나 혼자 만의 공간으로 만들었다. 오롯이 혼자인 이 공간이 좋아서 돈을 악착같이 모았다. 구질한 과거는 더 이상 내 이야기가 아닌 것처럼 살기 위해 그렇게 노력했다. 번듯한 직장과 몸에 꼭 맞는 수트라면 적어도 어디 가서 ‘파란 대문 집 아들’ 소리는 듣지 않았을 테니까.

 

치열하게 살아오는 동안 노래 한 곡 제대로 들어 볼 여유도 없었다. 그래서 이 숨 막히게 답답한 공간을 좋아했다. 여기에서 듣는 노래는 더 좋았다. 시끄럽게 울리는 소리 대신에 온전하게 자동차 스피커를 통해서 나오는 노래들은 꼭 나를 위한 공연장에 온 기분이었다. 세상에 소리라고는 차 안에서 나는 게 전부이고 바깥세상은 다른 세계인 것처럼 되어 버리는 이 안이 좋았다. 비가 오거나 눈이 와도 이 안에 있으면 그 추웠던 어린 시절의 겨울이 다시는 떠오르지 않았다. 뼈가 시리다는 느낌이 어떤 건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지겹게 앉아서 시간을 보냈던 집 앞 그 계단도.

 

익숙한 목소리였다. 라디오에서 이렇게 쌀쌀한 가을이 될 때면 이 노래를 들어야 한다며 디제이가 야심차게 선곡을 한 곡이 흘러나왔다. 가수 이름은 ‘김재환’ 이라고 했다. 방향등을 켰어야 했는데, 그 이름을 듣는 순간에 손이 굳어 버려서 깔깔한 소리를 내며 척 올라갔어야 했던 그 막대에는 손도 못 대고 동그란 핸들에 딱 붙은 손에 쥐어짜는 힘만 남아서 그럴 수가 없었다. 신호등은 바뀌었고 좌회전을 했어야 하는 길에서 직진을 하고야 말았다.

 

이만큼 머리가 컸으니까 드는 생각일지도 모르나 나는 그 형을 사랑하고 있었던 거라고, 한참이라는 시간 단위를 한참 더 지나고 나서야 깨달았다. 열일곱 살 코찔찔이는 알 수 없는 감정이었을 테니 그때에는 그냥 성가시고 눈에 자꾸만 걸리는 형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서른이 넘어버린 지금의 저에게 그 형을 떠올리면 드는 생각을 ‘사랑’ 이라는 흔하디 흔한 단어로 단정 짓는 불순을 저질렀다.

 

술만 마시면 너 같은 새끼가 어디에서 굴러 들어왔느냐고 패악을 부리던 부모님을 피해서 계단에 나가 앉아 있었다. 부모님이 잠들면 들어 갈 생각으로 그 추운 겨울에도 꿋꿋하게 버텼다. 그럼 그 형은 꼭 내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자기 방 창문에 기대어 있다가 허둥지둥 담배를 끄고 기타를 가지고 내려와서는 이리저리 튕기며 자장가랍시고 별 희한한 노래들을 불렀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다는, 웃음도 나오지 않는 가벼운 농담을 섞어 가며 노래를 했다. 그때는 어린 마음에 저를 꼭 놀리는 것 같아서 (반은 맞았겠지만) 시끄럽다고 핀잔을 주며 노래를 끊었다.

 

그때 형은 가수가 될 거라고 했다. 파란 대문 안에 살다보면 미래나 꿈이라는 희망찬 단어를 가까이 할 수 없는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미래라는, 희망이라는, 나중에라는 단어를 그 형에게서 최초로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열일곱 살의 나에게는 그 형이 그렇게 큰 사람처럼 보였다. 오늘이 아니라 내일을 살아가고 있는 형이 세상 그 누구보다 듬직하다고 느껴졌다.

 

형이 이사를 간다고 했다. 나만 파란 대문 안에서 처절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대문 밖, 계단 건너, 까만 대문 안의 형도 그건 마찬가지였나 싶었다. 형은 그냥 웃으면서 얘기했다. 월세가 많이 밀려서. 그래서 그때는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형이 이사간다는 사실도 슬펐지만, 나에게 있어 그때의 형은 뭐든지 다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트럭 하나도 가득 차지 않은 짐들을 정리하면서도 형은 계속 웃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이 계단에서 나를 위로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거라는 사실보다 나에게 추운 겨울에도 아이스크림을 사줄 수 있는 사람이 없어질 거라는 게 더 슬펐다.

 

‘우진아. 형 이사 가고 자리 잡으면 자주 놀러 올게.’

‘거짓말.’

‘왜 거짓말이야.’

‘안 올 거잖아.’

‘온다니까. 아직도 형 못 믿네.’

‘….’

‘우진이 어른이 되면 형이랑 술 한 잔 하자.’

 

나는 형이 타고 간 트럭의 번호를 잊지 않으려고, 눈물이 가득 차오르는 눈을 거칠게 부비며 몇 번이고 외웠는데 내가 형을 배웅하는 사이 수면제를 한 가득 먹고 미안하다는 네 글자만 남겨놓고 가버린 부모님 덕분에 한 순간에 기억에서 쓸어내려 보냈다. 나는 형이 돌아오기 전에 파란 대문을 벗어났다. 그때는 형이 절대로 찾아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형에게도 나랑 계단에 나란히 앉아서 떠들던 그 때 외에는 별로 좋지 못한 기억들로만 가득한 동네일거라고 생각해서였다. 나처럼.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기타 소리가 익숙했고 간간히 들리는 쇳소리가 익숙했다. 김재환이라는 이름 역시 익숙했지만 일말의 부정을 담아 흔한 이름일 거라고 내내 되새겼다. 세상에 목소리가 비슷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하지만 어느 곳에서 들어봤을 법한 뻔한 멜로디 위를 잇는 가사는 흔할 수가 없었다. 담담하게 짓이기는 문장들은 내가 그렇게 벗어나고 싶어 했던 파란 대문 집 앞 계단이었다. 나조차도 잊고 살았던 우리 집 번지수였고, 까진 담장 벽돌이었고, 망가진 문 손잡이였다. 등에 땀이 날 정도로 온도를 올려 둔 차안이 순식간에 계단에 앉아 있는 열일곱 살의 나로 돌아가게 만들었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노래가 끝이 나고 디제이가 조용하게 말을 이었다. 오늘이 5주기라고 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던 가수였는데 교통사고로 안타깝게 별이 되었다고 했다. 어쩐지 날씨가 쌀쌀했다. 내 등에 덮어줬던 겉옷을 뿌리치지 않았다면, 손이 얼어붙을 정도로 추웠던 날에 형이 사 준 아이스크림 맛있었다고 말 한 마디라도 했으면, 형이 불러주는 노래를 중간에 끊지 않고 끝까지 다 들었다면, 어쩌면 형이 죽지 않지 않았을까 하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랬으면 형의 노래를 라디오가 아니라 지금 제 옆에 비어있는 저 자리에서 들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

 

괜히, 한 번. 그런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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