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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사귀는 사람 생겼어. 정말 간만에 얼굴 좀 보자는 말에 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신나가지고는 멀끔하게 차려입고 오니 내뱉는 말이 ' 저거 ' 였다. 하하, 그래? 라는 말은 토하듯 뱉었지만, 차마 축하해, 정말 이라는 말은 이어서 하지 못했다. 진짜 곧 죽어도 못하겠다 싶었다. 

  그리고 또 다시 봄이었다. 추운 겨울이면 너는 항상 이별을 했고, 적당히 따사로워질 봄이면 새 연애를 했다. 꽃샘추위가 찾아오는 그날이면, 나는 항상 희망고문에 괴로워했다. 진짜 너 같은 애가 어디 있느냐. 왜 아무도 널 데려가려고 하지 않느냐. 우리 지훈이 나랑 연애나 할까. 그 말을 끝으로 너는 얼마 지나지 않아 새 사람을 데려오곤 했다. 빌어먹을 꽃샘추위, 썩을 꽃샘추위, 썅 …놈의 봄.

  " 이번엔 진짜 오래 갈 거야. "

  " 그래. 그랬으면 좋겠네. "

  " 넌 연애 안 해? 나도 네 애인 좀 보고 싶다 지훈아- "

 

  박우진, 네가 연애를 하는데 내가 어떻게 연애를 해. 너 아닌 다른 사람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데. 눈에 차지도 않는 사람과 교제해봐야 서로 좋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 득을 보려고 연애하느냐는 말에 그럼 실을 생각하며 연애하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말해주고 싶었다. 중간 중간 휴대전화를 바라보며 실실 웃어대는 박우진을 보는 것이 꽤 큰 고역이었다. 남들은 짝사랑에서 연애로 잘만 잇는다는데, 그 남들엔 내가 포함이 안 되는 게 맞는지 … 깊은 한숨을 내뱉으려다 그냥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 그러고 보니 지훈이 넌 누구 좋아한다고 말을 한 적이 없네? "

  " 어? "

  " 누구 좋아했었는데? 지금 좋아하는 사람 있어? "

  너를 좋아했고, 너를 좋아한다. 이 말을 수없이 너에게 전하고자 했었는데. 그런데 왜 ' 너 ' 의 ㄴ도 입 밖으로 꺼내지도 못하는지. 그냥 뭐 있었어. 와 음 있지 라는 말을 하니 박우진의 표정엔 서운함이 잔뜩 묻어났다. 진짜 완전 많이 친한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말도 제대로 안 해주고- 지훈아, 나는 진짜 서운하다. 서운해. 너는 서운하기만 하지. 나는 슬픈데. 천천히 박우진의 어깨를 쓱쓱 쓸었다.

  " 오래 좋아한 거 아니어서 말 안했어. 서운해 하지 마. 박우진 너는 내 친한 친구인데 뭐. "

  미친놈, 이 미친놈. 이제는 제 입으로 비수를 꽂는다. 남이 박은 것보다 더 아픈 거 같기도 하다.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밖으로 나섰다. 입김이 옅은 것을 보니 봄이 왔긴 했구나 싶다. 너는 또 새 봄인데. 나는 여전히 헌 봄을 껴안고 간다는 것이 서글프다고 해야 하나. 익숙하다고 해야 하나. 멀어져가는 박우진의 뒷모습을 보니 입 안이 쓰다. 

  ' 지훈아, 난 봄이 좋아. ' 

  ' 왜? '

  ' 날도 좋고, 연애하기에도 좋고, 그렇잖아? '

  ' 아- 그래? '

  ' 그것도 그렇지만, 봄에 너랑 함께하는 것도 좋은걸. '

  봄이 좋다고 그러지 말지. 나랑 함께하는 게 좋다고 그러지 말지. 적당히 따사로운 햇볕이 너를 비춰서, 그래서 오늘은, 내일은, 모레는, 꼭 널 포기해야지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나는 봄이 좋으면서도 싫었다. 그저 너 때문에. 

  " 그 형 또 사귀는 사람 바뀌었어요? "

  " 응. "

  " 형은 수조 속 오래된 물고기네. 그래서 보류인 형이랑은 언제 사귀어준다고 그랬어요? "

  " 그렇게 말하지 마. 박우진 그런 사람 아니야. "

  " 아니긴요. 정신 차려요 형. "

  박우진은 정말 그런 사람이 아니지만,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닌 박우진 곁에서 떠나지 못하는 미련한 사람이었다. 박우진의 연애 공백기는 항상 짧았다. 박우진은 불타오르면 사귀고 식으면 헤어졌다. 그게 나쁜 것은 아니다. 나름 서로 합의 하에 이별을 택하는 것이고, 서로를 응원한다고 했다. 그저 아무것도 모르는 제 3자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을 뿐이지. 박우진은 이번에도 그런 연애를 할 것이다. 본래 그래왔던 사람이니까. 

  " 형은 질리지도 않아요? "

  " 질릴게 뭐가 있는데? "

  " 이쯤이면 나랑도 사귀어주지. 끝난 사이가 되더라도 사귀어주지. 이런 생각 안 드나? "

  " 사귀다가 헤어지면, 이런 사이로라도 지낼 수 있을 거 같아? "

  " 난 차라리 사귀고 헤어지겠다. 적어도 연애는 했었다는 거니까. "

  생각을 전혀 안 해본 건 아니었다. 다만 헤어지면 보기조차 힘든 사이가 되는 걸 떠올리니 짝사랑의 서글픔보다 더 서글퍼졌다. 그래서 나는  이 거지같은 짝사랑을 택했다. 

  쓴 술을 연신 삼키고 나서야 집으로 향했다. 어두컴컴한 것이 무지 공허하게 느껴지는 게, 네가 보고 싶었다. 정말 보고 싶었다. 

  " 우진아, 박우진. "

  허공에 흩어지도록 네 이름을 불렀다. 입 밖으로 나오는 네 이름이 그리도 썼다. 꽃샘추위와 같은 너와의 관계는 벌써 오래도 되었고. 계속 찾아오는 꽃샘추위를 나는 어찌하지 못했다. 또 다시 겨울이 와 네가 홀로 있을 그 시기를 위로 해주고 팠다. 정착을 못하는 네가 유일하게 정착하는 '친구 '박지훈의 자리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푹신한 침대가 아닌 바닥에서 잠이 들었다. 그 딱딱하고 차가운 곳에 있다가 꿈을 꿨다. 너의 곁에 계속 있어주는 꿈이었다. 차가운 바람이 들어와 꿈에서 깼다. 봄바람치고는 너무나도 찼기 때문에, 그게 꿈이란 걸 너무 잘 알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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