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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진아, 좋아해.”

 

 

참 당황스럽고 아득한, 벚꽃이 막 피기 시작하려 하던, 그 좋은 봄날에 찾아온 갑작스러웠던 고백이었다. 좋아해. 조금 오래됐어. 계속 안 말하려 했는데 힘들더라. 제 뒷머리를 긁적이다가 결국엔 제 눈가를 긁적이며 그렇게 말하는 다니엘이 낯설어 보였으며 아무 말도 못하고 가만히 입만 벙긋거리며 두 눈을 껌뻑이는 제가 참 한심하게 느껴졌었다. 우진은 어떤 말을 해야 하며 어떤 행동을 취해야하는지, 그 짧은 순간에 참 많은 고민을 했다. 그런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다니엘은 곧 뒤를 돌아 등을 보였다. 그리고 천천히 그에게서 멀어져갔다. 그게 10년이 조금 덜 되는 시간동안 알고 지냈던 다니엘의 마지막 모습이 될 줄은 우진은 꿈에도 몰랐다.

 

 

 

봄이 오고 있음을

- 립스

 

 

 

그 모습을 끝으로 다니엘은 우진의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연락도 되지 않아 어디로 가버린 것인지 며칠간은 조금 궁금했었지만 금세 우진은 제 원래의 생활패턴으로 돌아왔다. 다니엘과는 그리 깊은 관계도 아니었으며 오래 보긴 했지만 그냥 조금 친한 형 동생,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니었던 얄팍한 관계를 이어나가던 사이였다. 10년이 다 되어가던 인연임이 무색할 만큼 그 고백도, 존재도, 우진은 별 생각이 없었다. 아무래도 저는 다니엘에게 단 한 번도 그런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었기에.

 

막 피기 시작하던 벚꽃이 지고, 무더웠던 여름이 지나고, 감기로 고생하던 가을이 지나고, 제 생일과 다니엘의 생일이 있던 겨울이 지나고, 또 한 번의 봄이 스멀스멀 몰려올 때 우진은 그제야 다니엘을 다시 떠올렸다. 그 형은 어디로 간 걸까. 뭘 하며 지낼까. 그가 고백을 해오던 봄날이 되자 그가 떠오르는 건 무슨 경우인지. 우진은 그가 떠올랐다 해도 별로 당황하지 않았다. 그저 그냥 약간의 궁금증이 있을 뿐이었다.

 

그 형은 언제부터 날 좋아했을까. 우진은 오랜만에 그가 생각난 김에 옛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그러다가 다니엘은 참 다정한 사람이었다는 기억을 떠올렸다. 혹시 제게만 다정했던 사람이었을까. 우진은 조금 더 기억을 곱씹어보았다. 사람이 사랑에 빠지면 어떤 행동을 하더라, 웃음이 많아진다던 말을 어디선가 들었던 것 같은데. 우진이 떠올린 다니엘의 얼굴은 늘 저를 향해 웃고 있는 모습이었다.

 

아. 우진은 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그때 그 웃고 있던 다니엘의 얼굴이 제 코앞에 나타난 것만 같았다. 그리도 티를 냈었는데 왜 그때의 저는 몰랐을까. 오래되어 기억은 잘 나지 않았지만 아마도 처음 알게 되었던 그날부터 그 사람은 쭉 저를 향해 웃고 있었다는 사실을 왜 이제야 알아버린 것일까.

 

 

“괜히, 미안하네.”

 

 

조금 오래됐다고. 힘들었다고 쓰게 웃으며 말하는 다니엘의 얼굴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이제는 제 곁에 있지도 않은 사람을 우진은 밤새 그리워하고 떠올리다가 그렇게 참 오랜만에 다른 누군가를 떠올리다가 밤을 지새웠다. 잠에 들기 위해 새벽에 따뜻한 물로 샤워도 해보았으나 그 생각을 떨쳐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잠을 자지 못해 조금은 퀭한 얼굴로 창문을 열면 아직은 쌀쌀한 공기가 우진의 몸을 가득 채워왔다.

 

 

- 그 형은 잘 지내고 있을까.

 

 

우진은 시원함으로 가득 찬 제 몸을 움찔거리며 살짝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기분은 차분히 가라앉아있었고 그의 안부가 궁금했으며 뭔가 미안하다고 말을 전해야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전화번호도 바꿔버리고 제 주변사람들과의 인연은 전부 끊어버린 채 떠나버린 그가 참 야속했고 이제야 그의 감정을 깨달아버린 제가 한심하고 답답했다. 형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우진은 계속해서 다니엘을 떠올리다가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끝도 없이 몰려오는 미안함에 이내 창문을 닫고 나갈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집에만 처박혀서 그를 떠올린다면 오늘 밤도 똑같이 불면에 시달릴 것이 뻔했으니.

 

외투를 걸치고 휴대폰과 지갑만 챙겨서 집을 나오니 길거리에 줄지어있는 벚꽃나무들이 눈에 들어왔다. 꽃봉오리가 움찔거리며 저를 피워내고자 노력하거나 이미 살짝 벌어져 있는 그 벚꽃들의 풍경들이 이리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소중했던 인연을 아무렇지도 않게 보냈던, 그러나 담담했던

 

그 봄이 다시 오고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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