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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해.”

 

무심한 듯 툭 던져진 말에 안 그래도 쥐죽은 듯이 조용하던 방안에 적막이 감돌았다. 초조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애꿎은 입술만 물어뜯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침묵은 곧 거절. 여러 차례의 고백과 여러 차례의 거절을 가장한 침묵. 이것이 우리 둘 사이의 암묵적인 룰. 곧 있으면 언제 고백했냐는 듯 넌 배시시 웃으며 장난이야, 라고 말하겠지. 그러면 난 무슨 그런 장난을 하고 그러냐? 하고 대답하며 핸드폰 액정으로 시선을 돌릴 거야. 자, 그러니까 어서 장난이라고 말해.

 

이어지는 침묵에 눈치라도 보듯 빠르게 움직이는 눈동자를 말없이 빤히 바라보다 여전히 굳게 다물린 채 이로 잘근잘근 짓 씹히는 중인 입술로 시선을 옮겼다. 어찌나 세게 씹어댔는지 송골송골 맺힌 피가 시선을 잡아끌었다. 그에 저도 모르게 미간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저 버릇, 고치라니까 말 드럽게 안 듣지. 작게 한숨을 내쉬고 이에 짓눌린 입술로 손을 뻗으려는 찰나 굳게 다물렸던 입술이 천천히 벌어지며 억눌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엔 장난… 아니다. 장난으로 안 해. …내가 니 좋아한다고, 박지훈.”

“……야, 우진아. 박우진.”

 

이름만 불렀을 뿐인데 흠칫 떨리는 어깨에 절로 한숨을 새어 나왔다. 왜 그래, 암묵적인 룰이었잖아, 그걸 왜 갑자기 깨는데. 목구멍 끝까지 올라온 말을 차마 뱉어내진 못했다. 민현의 침대에 누워 우진을 보던 지훈은 급격히 몰려오는 피로감에 손을 들어 올려 뻑뻑한 눈가를 꾹 눌러 문지르다 손을 떼고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그리곤 제 침대 위에 부동자세로 앉아있는 우진을 바라봤다. 덤덤했던 목소리와는 달리 촉촉이 젖은 눈가에 다시금 한숨이 새어 나왔다. 다소 짜증스레 머리칼을 헤집은 지훈은 말없이 제 침대 위로 올라가 누웠다. 그런 제 뒤로 따라붙는 우진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무시했다. 이윽고 침대에 몸을 누인 지훈은 한층 가까워진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다 고개를 살짝 틀어 우진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자 지금껏 저를 보고 있었는지 우진과 눈이 딱 마주쳤다. 툭 치면 왈칵 눈물을 쏟아낼 것 같은 우진의 눈을 한참을 말없이 마주하던 지훈은 이불을 끌어 올려 머리끝까지 덮어버리는 것으로 우진에게서 시선을 차단했다. 이불 너머로 흡, 하는 숨 혹은 울음을 먹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마저도 못 들은 척 눈을 감았다.

 

 

 

 

 

 

 

 

 

 

Unavoidable

w. 가미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다. 박지훈이 언제 제 맘 한구석을 차지했는지. 어찌 보면 자연스럽게 서서히 천천히 스며들었다는 말이 맞는 표현일지도 모른다. 그만큼 자연스럽게 깨달은 감정이었으니까. 정신을 차리고 보면 저도 모르게 박지훈의 뒤꽁무니를 쫓고 있었으니까. 다만 한가지 알 수 있었던 건, 저 혼자만의 감정이 아니라는 것. 박지훈 역시 저와 같은 감정으로 저와 같은 시선으로 저를 보고 있었다는 것. 그래서였는지도 모른다. 장난을 가장한 고백을 하기 시작한 건.

 

처음 장난을 가장한 고백을 한 건 프로듀스101 파이널이 끝난 직후였다. 데뷔 멤버에 들고 싶었으나 들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한 명, 두 명, 시간이라는 시간은 모두 질질 끌며 호명을 이어나가는 그 짧지도 길지도 않은 시간 속에 호흡하는 게 버거울 정도로 긴장했고, 점점 위로 올라가는 순위와 다르게 불리지 않는 제 이름에 일찌감치 마음을 놓은 상태였었다. 그러던 중 생각지도 못한 순위에 제 이름이 불리는 순간 심장이 멎을 듯이 빠르게 뛰었고, 그 어떤 것도 두려울 게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2위로 이름이 불린 지훈을 멍하니 바라보며 오늘 고백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건.

 

많은 이들의 축하 속에 울고 웃으며 대기실로 들어온 우진은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찬가지로 대기실 문을 열고 들어온 지훈을 붙잡고 대뜸 고백부터 했다. 지훈아, 좋아해. 당연히 저와 같은 마음일 거라 생각했던 지훈이 당황한 듯한 표정으로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리는 걸 본 순간 우진은 아차 싶었다. 지훈은 아니었나 보다고, 제 착각이었나 보다고. 그럴 리 없다는 생각을 채 하기도 전에 어떡하지, 라는 걱정이 먼저 앞섰다. 제 직감이 아무리 같다고 외쳐도 지훈의 입에서 긍정의 답이 나오지 않는 이상 제 직감은 틀린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든 이 상황을 무마해야 했다. 좋든 싫든 앞으로 약 1년하고도 6개월가량 살을 부대끼고 지내야 하니까. 그래서 선택한 게 장난이야, 하며 웃어넘기는 거였다. 그게 제일 쉬운 방법이었으니까. 제 감정을 밀어붙이기엔 우진은 어렸고, 두려웠다. 내내 난처한 표정을 짓던 지훈은 우진의 장난이라는 말에 그제야 웃어 보였다. 야, 넌 무슨 그런 장난을 하고 그러냐. 덧붙여 오는 지훈의 말에 우진은 싸하게 아려오는 가슴께를 꾹 누르며 애써 웃어넘겼다.

 

이후 처음의 고백을 정말 장난이었던 것으로 포장하기 위해 몇 번이나 장난을 가장한 고백을 반복했다. 지훈아, 좋아해. 그때마다 지훈 역시 한결같은 반응이었다. 난감한 듯 눈동자를 굴리며 침묵을 유지하는…. 그런 지훈의 표정과 반응에 우진은 매번 상처받은 마음을 숨긴 채 배시시 웃으며 장난이야, 하고 말했다. 그러면 지훈은 그제야 아, 진짜 박우진. 하며 굳은 표정을 풀었다.

 

그렇게 장난을 가장한 고백을 여러 차례 반복하며 은연중에 쌓여있던 제 감정을 해소하고, 시간이 흘러 다소 무뎌진 감정에 이 상황을 저 나름대로 즐기고 있던 우진의 마음이 터져버린 건 별다른 이유는 아니었다. 그냥… 버거워졌달까, 혼란스러워졌달까. 나는 어디까지 장난이고 어디까지 진심이며 너는 어디까지 장난이고 어디까지 진심인지. 그 경계가 흐릿해지자 제 마음 역시 갈피를 못 잡고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러던 중 스케줄이 없던 숙소 거실에서 빈둥빈둥 뒹굴던 우진에게 마찬가지로 소파에 누워있던 민현이 마치 안부 인사를 묻듯 자연스럽게 물었다.

 

“우진아, 너 지훈이랑 사귀어?”

“……네?”

 

심심하다며 거실 바닥을 데구루루 굴러다니던 우진은 민현의 물음에 돌처럼 굳어 행동을 멈췄다. 숨긴다고 숨겼는데, 민현이 알아챌 만큼 티가 났던 걸까…. 그대로 민현의 얼굴을 마주하면 다 들켜버릴 것만 같아서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TV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아니요? 하고 최대한 덤덤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민현은 아, 그래? 하고 대답하더니 이내 입을 다물었다. 그에 우진은 궁금함에 안달이 났다. 대체 형은 무얼 보고 무얼 들어 저런 말을 한 걸까. 애꿎은 입술만 잘근잘근 씹어대던 우진은 큼큼, 하고 목을 두어 차례 풀더니 궁금하지만 궁금하지 않은 척하며 민현에게 물었다. 형, 근데 갑자기 그게 뭔 소리예요? 그에 민현 역시 우진이 물어 봐주길 기다렸다는 듯이 곧장 대꾸했다.

 

“지훈이가 엄청… 뭐랄까, 질투했달까? 그래서.”

“……엥?”“며칠 전에 지훈이랑 얘기하다가 어쩌다 네 얘기가 나왔는데 엄청 열을 내더라고.”

“……무슨 얘길 했는데요.”

“아니, 뭐… 별건 아니고, 우진이 네가 날 엄청 좋아한다, 뭐 이런 얘기 했었거든.”

“뭐야, 그게.”

“하하, 그냥 웃자고 한 말이었는데 갑자기 그 얘기 듣더니 지훈이가 아닌데요? 박우진 저 좋아하는데요? 하고 말하면서 엄청 화를 내는 거야. 그래서 혹시 너네 그런 사인데 내가 눈치 없이 군건가 싶어서.”

 

민현의 말에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우진은 초조한 듯 제 엄지손톱을 잘근잘근 씹었다. 박지훈 미친놈이 한 행동보다 혹여 지훈을 향한 제 마음을 민현이 알아차린 걸까 봐, 그게 두려웠다. 숨긴다고 숨겼는데 사실 다 티가 났던 걸까 봐. 박지훈의 행동만 보고 사귀냐는 질문을 하는 건 너무 오버잖아…. 우진아. 다시금 저를 불러오는 민현의 목소리에 우진이 다소 과장된 목소리로 아 형! 말이 되는 소리를 해요, 남자끼리 무슨! 하고 대답하며 내내 등 돌리고 있던 몸을 돌려 민현을 바라봤다. 그리곤 곧 입을 꾹 다물었다. 저를 마주 보는 민현의 눈이 다 알고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 차마 무어라 말할 수가 없었다. 어색하게 흐르는 침묵 끝에 민현이 …그래, 하고 말하며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우진은 말없이 눈을 꼭 감았다. 이제 이 장난도 그만해야 할 것 같다고, 끝을 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좋아해.”

“…….”

“이번엔 장난… 아니다. 장난으로 안 해. …내가 니 좋아한다고, 박지훈.”

“……야, 우진아. 박우진.”

 

제 이름만 부르며 민현의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지훈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제 머리칼을 헤집더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제 침대 위로 올라가 버렸다. 그 무정함에 울컥하는 감정이 올라왔다. 입술을 꽉 깨무는 것으로 당장이라도 터질 듯한 감정을 억누르며 2층에 올라가 누운 지훈을 바라봤다. 천장만 바라보던 지훈의 시선이 잠시 제게 향했다가 이내 두툼한 이불 속으로 사라졌다. 그 순간 터져 나오는 눈물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나쁜 새끼, 대답이라도 좀 해주지… 내 고백엔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거냐, 이 매정한 새끼야….

 

그렇게 우진은 춥디추운 겨울, 지훈에게 이렇다 할 대답 하나 듣지 못하고 차였다. 차였다고 하기도 우습지만 그렇다고 받아준 것도 아니니 차인 거나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그냥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안 그러면 자신만 더 비참해지니까.

 

그날 이후 우진은 지훈을 미치듯이 피해 다녔다. 피한다고 해봐야 대기실에서 끝과 끝에 앉고, 벤을 타고 오갈 때 최대한 멀찍이 떨어져 앉는 게 고작이었지만…. 그나마 다행이다 싶은 건 무대에 올랐을 땐 춤추고 노래하느라 바빠 서로를 신경 쓸 정신이 없었고, 인터뷰나 무대 멘트 땐 대형이 끝과 끝이라 딱히 부딪힐 일이 없다는 점이었다. 그렇게 우진의 박지훈 피해 다니기, 가 한 달 정도 지났을 때였나, 신도 참 야속하지. 그렇게 원할 땐 안 붙여주더니 원치 않을 땐 어쩜 이렇게 잘 붙여주는지.

 

“룸메하고 싶은 사람 있으면 먼저 말해. 없으면 제비뽑기한다?”

 

새로 이사한 숙소 거실에 빙 둘러앉아 지성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멤버들은 저마다 마음이 맞는 사람과 얘기를 나누곤 하나, 둘 손을 들고 방을 정해갔다. 그 속에서 우진은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듯 멍한 시선으로 거실 창밖만 바라봤다. 박지훈이랑만 같은 방 안 되면 되지, 뭐. 그러던 중 지성의 입에서 어, 지훈이. 하고 박지훈의 이름이 나오자 우진은 저도 모르게 몸을 흠칫 떨었다. 관린이랑 쓰겠지, 뭐. 안 듣고 싶은데 안 보고 싶은데, 그런 제 의지와 다르게 제 귀는 지훈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신경이 곤두서고 제 눈은 지훈을 보기 위해 데구루루 굴러 저와 반대쪽에 앉은 곳으로 향했다. 그러자 어째서인지… 저를 보고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그냥 우연의 일치인지 지훈과 눈이 마주쳤다. 저를 빤히 바라보는 지훈의 시선에 우진이 미간을 구기며 눈을 돌리려 할 때, 지훈이 덤덤하게 말을 툭 뱉어냈다.

 

“저 우진이랑 쓸게요.”

 

 

 

 

 

“과자 맛있게 먹었어?”

“……어? …뭐?”

“과자, 맛있게 먹었냐구.”

 

지훈이 개인 스케줄로 방을 비운 사이 모처럼 마음 편하게 방을 뒹굴며 밀린 드라마며, 예능을 모조리 섭렵하던 우진은 벌컥 방문을 열고 들어오는 지훈에 노트북을 보며 실실 쪼개던 입을 꾹 다물었다. 언제 이렇게 시간이 지났지…. 노트북을 덮으며 벽을 향해 돌아누운 우진은 지훈이 평소처럼 저를 신경 쓰지 않을 거라는 생각과 다르게 말을 걸어오는 통에 짐짓 당황했다. 과자? 무슨 과자? 눈꺼풀을 빠르게 깜빡이며 지훈이 말하는 과자의 행방을 쫓던 우진은 오늘 아침 눈을 떴을 때 제 노트북 위에 고이 놓여있던 봉지 과자가 떠올랐다. 갑자기 어디서 난 과잔가 했더니…. 어어, 잘 먹었어…. 우진이 우물쭈물 대답하자 그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지훈이 그래? 하고 어딘가 모르게 신난듯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에 우진이 슬쩍 몸을 틀어 뒤를 돌아보자 저를 보며 웃고 있는 지훈의 해맑은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그 미소에 가슴이 간질간질해지는 느낌이 들자 우진이 황급히 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떻게, 대체 넌 어떻게 날 향해 그렇게 웃을 수 있는 건데?

 

 

 

“배틀… 트립이요?”

“우와! 전 좋아요!”

 

제 의사는 묻지도 않고 룸메가 된 것도 그렇고, 제가 좋아하는 과자를 자는 사이에 노트북 위에 올려놓고 가는 것도 그렇고… 다시 예전 같은 사이로 돌아가고 싶은 건지 아니면 단순히 어색한 사이가 불편해서 그러는 건지, 과자 사건 이후로 유난스럽게 저를 챙기는 지훈에 우진은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예전부터도 무심한 듯 굴다가도 다정스럽게 챙기기는 했지만 제대로 고백하고 차인 뒤론 서로 피해 다니기 바빴고 (물론 우진이 일방적으로 피한 거지만) 룸메가 되기 전까진 아니 룸메가 되고 나서도 한동안은 말도 제대로 섞지 않았었는데… 그런데 갑자기 왜…. 목적을 알 수 없는 지훈의 행동에 머리가 복잡해지던 우진은 복잡해지는 머리만큼이나 복잡해지고 뒤숭숭해진 마음에 혼란스러웠고 또 흔들리고 있었다. 그랬는데, 그런데… 배틀트립이라고? 둘이 여행을… 가라고?

 

우진은 제 앞에서 수첩을 뒤적이며 촬영 날짜를 읊어주는 매니저 형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뭐가 그리 신나는지 제 옆에서 방방 뛰는 지훈을 그저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기쁘다고? …왜? 여행이라서? 네가 차버린 널 좋아하는 나랑 가는 건데, 그런데도 기쁘다고…?

 

한참을 좋다고 방방 뛰던 지훈은 저와 상반되게 조용한 우진에 하던 행동을 멈추곤 우진의 눈치를 살폈다. 우진아, 왜 그래? 넌 안 좋아? 정곡을 찌르는 지훈의 말에 우진이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아니… 나도 좋지…. 하고 말끝을 흐리며 대답하자, 그치? 좋지? 나 여행 처음이라 엄청 좋아! 그것도 너랑 간다니 너무 좋잖아! 하고 말하며 주먹으로 아프지 않게 우진의 팔뚝을 툭 쳤다. 덧붙여진 지훈의 말에 우진은 머릿속이 더 복잡해지는 것 같았지만 이내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생각을 떨쳐냈다. 혼자 고민한다고 지훈의 생각을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정해진 스케줄인데다 다른 것도 아니고 여행이니 저도 잡생각은 이만 접고 맘껏 즐기기로 했다. 뭐든 즐길 수 있을 때 즐겨야 한다잖아.

 

 

 

걱정과 달리 배틀트립 촬영은 순조로웠고, 순조롭다 못해 매우 즐거웠다. 즐거웠다는 표현도 부족해, 행복했다는 말이 맞을까. 마치 꼭 연인과 같이 꽃놀이를 온 그런 기분이었으니까. 아 물론 집라인은 별로였지만, 고소공포증으로 힘들어하는 저를 살피며 살뜰히 챙기는 박지훈에 힘들었던 것도 금세 기억에서 잊혔다.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정말 영화에서나 볼 법한 벚꽃 샤워도 해보고, 별이 촘촘히 박힌 밤하늘을 보며 맥주도 한 캔 하고… 모든 게 좋았다. 단순히 좋은 곳에 와서 좋은 건지 아니면 좋은 곳에 여전히 좋아하는 박지훈과 함께 와서 좋은 건지. 정확히 무엇이 어떻게 좋은지는 자신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모든 게 좋았다는 것만은 사실이었으니까, 그러면 된 거 아닐까.

 

“일 층에서 같이 잘래?”

 

처음 카라반에 들어와서 했던 말을 그대로 되풀이하는 박지훈에 우진은 당황해서 입만 벙긋거렸다. 그러니까 아까도 그렇고 대체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하는 거냐고. 입만 벙긋거리며 아무런 말도 못 하는 우진을 빤히 바라보던 지훈은 입술을 삐죽이며 어깨를 한 번 으쓱이더니 싫으면 말고, 하고 말하곤 낑낑대며 좁은 2층으로 올라가 누웠다. 우진은 그런 지훈의 뒷모습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기만 했다. 아니, 지금 박지훈 삐진 거임? 어? 대체 왜?! 어느새 침대에 누운 지훈이 여전히 우뚝 서 있는 우진에게 안 자? 아니면 그러고 서서 자려고? 하고 말을 건넸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우진이 어? 아니… 자야지, 하고 대답하며 허둥지둥 카라반을 밝히던 전등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대체 박지훈이 왜 저럴까, 하는 생각에 쉽게 잠들지 못하고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던 우진은 이미 잠들었을 줄 알았던 지훈이 우진아, 하고 저를 부르자 화들짝 놀라며 어, 억?! 하고 뒤집어 까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에 위에서 낮게 쿡쿡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냥, 잘 자라고, 하는 말이 들려왔다. 그에 가슴 한구석이 간질간질해지는 것 같아 손바닥으로 가슴팍을 문지르던 우진 역시 니도…. 하고 작게 중얼거리듯 대답하곤 이내 눈을 꼭 감고 잠을 청했다.

 

“푸핫, 너 머리 진짜 참새 둥지 같다.”

“…와, 어이없네. 그러는 지는 완전 동네 백수 형이면서.”

 

아침부터 어딜 쏘다닌 건지 입에 종이컵을 물고 찬바람을 머금고 돌아온 지훈을 훑어보던 우진은 제 머리를 가리키며 비웃는 지훈에게 너 역시 나 못지않다며 맞대응을 하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긴 팔 후드를 입고 있는 지훈과 달리 얇은 민소매 하나만 덜렁 입고 있는 우진을 위아래로 훑어보던 지훈은 픽 웃음을 흘리며 위험하네, 박우진. 하고 중얼거렸다. 그에 우진이 뭐? 니 방금 뭐라 했냐? 하고 되묻자 아니, 그냥 너 귀엽다고. 하고 대답하자 오히려 우진의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그에 또 한 번 웃음을 흘린 지훈이 잔뜩 좁혀진 우진의 미간을 검지로 콕 찌르며 얼른 씻어라, 못났다. 하고 말하더니 우진의 등을 떠밀어 욕실로 집어넣었다.

 

여행을 다녀온 뒤 며칠이 지나지 않아 스튜디오 촬영까지 무사히 끝냈다. 몰아치는 스케줄에 힘들고 지치긴 했지만 박지훈과 함께한다는 것 하나만으로 충분히 즐겁고 힘이 났다. 그건 박지훈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녹화 중간중간 농담도 주고받았다. 마치 예전으로 돌아간 것처럼. 박지훈은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걸까. 제가 고백하지 않았던 그때로. 그렇다면 그렇게 해줘야 할까. 고백 따윈 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런 일은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행동해야 할까. 어떻게 하는 게 맞는 것인지 당최 알 수 없었다.

 

우진이 지훈을 놓고 또 접기로 해놓고 흔들리는 마음을 놓고 고민하는 사이 시간을 흐르고 흘러 네 번째 앨범 작업에 들어갔고, 해외 투어의 시작을 알리는 서울 콘서트를 무사히 끝마치고, 네 번째 앨범으로 컴백하며 짧게나마 국내 활동을 하고, 해외로 넘어가 예정된 콘서트를 하나, 둘 진행해갔다. 숨 가쁘게 달리고 달려 마지막 투어를 끝내고, 여기저기 잡힌 행사를 해치우고 나니 어느새 여름을 지나 또 가을을 지나 초겨울이 되어 있었다.

 

“아우… 아직 초겨울인데 너무 추운데. 서울에서 못 살겠어….”

“야, 우진아. 나시 입고 그런 소리 하지 마라.”

 

마지막 앨범 작업에 한창일 때, 연습실 거울이 뿌예질 정도로 연습하던 중 잠시 가진 휴식 타임에 지성이 형을 따라 카페에 다녀온 우진이 연습실로 들어서기 무섭게 몸에 걸치고 있던 패딩을 벗어 던지며 한 말에 지훈이 콧방귀를 끼었다. 아무리 연습하는 동안 땀 흘리고 덥다지만 한겨울이라 해도 믿을 만큼 낮아진 기온에 민소매가 웬 말이냐고. 저래놓고 춥다고 툴툴거리는 게 지훈은 어이가 없었다. 따뜻하게 입고 춥다고 해도 모자랄 판국에… 어휴.

 

춥다며 양손으로 훤히 드러난 팔뚝을 슬슬 쓸며 열기를 만드는 와중에도 차갑디차가운 주스를 입에서 떼지 않는 우진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지훈은 연습에 지쳐 축 처진 몸을 일으켜 우진이 앉아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리곤 우진의 옆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던 털이 가득한 제 후드를 집어 우진 품에 던졌다. 얼떨결에 지훈의 옷을 받아든 우진이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지훈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춥다며, 그나마 그게 제일 얇으니까 입고 있으라고. 하고 대답했다. 그에 우진이 괜찮은데…. 하고 중얼거리며 지훈의 옷을 옆에 내려놓자 지훈의 미간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야, 야. 우진아. 좀 입어줘라. 지훈이 삐지겠다.”

“아, 삐지긴 누가 삐져요.”

“너요.”

“아, 형.”

“너, 박우진에 살고 박우진에 죽는 박지훈이잖아.”

“지성이형 뭔 소리야, 반대지. 박지훈에 살고 박지훈에 죽는 박우진이지.”

“뭐야, 서로 죽고 못 사는 거야?”

“오~ 사겨라, 사겨라. 아주 천생연분이 따로 없구만!”

 

깔깔거리며 웃고 떠드는 멤버들과 그런 멤버들을 보며 나 참, 하고 기가 찬다는 듯이 웃음을 흘리는 지훈을 멍하니 바라보던 우진은 돌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연습실을 빠져나갔다. 갑작스러운 우진의 행동에 다물 입을 다문 채 쾅 하고 요란하게 닫힌 연습실 문만 멀거니 바라봤다. 장난이 심했나? 하는 말들이 하나, 둘 나오기 시작하자 화장실이 급했나 보죠, 뭐. 하고 말한 지훈은 저러다 또 감기 걸리지. 하고 중얼거리더니 우진이 조금 전 내려뒀던 제 옷을 집어 들고 연습실을 벗어났다.

 

그 시간 연습실을 빠져나온 우진은 답답한 마음에 기분 전환을 할 생각으로 건물 옥상으로 향했다. 마땅히 갈 곳도 없어 옥상 입구 근처에 쪼그리고 앉아 무릎에 얼굴을 파묻곤 조금 전 상황을 되짚어 봤다. 박지훈에 죽고 박지훈에 죽는 박우진이라니. 딴에 마음 접는다고 접었는데… 아니 사실 솔직히 접히다 다시 펼쳐졌지만…. 그래도 딴에 숨겨보겠다고 무던히 노력했는데, 그랬는데도 그런 말이 나올 만큼 티가 났던 것일까. 아니면 그냥 제가 과민반응하는 걸까? 하지만 그렇다기엔 언젠가 민현에게서 들은 사귀냐는 말이 머릿속에서 잊히지 않았다.

 

얼마나 그렇게 쪼그리고 앉아있었을까, 몸이 오들오들 떨리며 춥다 느껴질 때쯤 어깨 위로 따듯하고 푹신한 것이 감싸지는 느낌이 들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지훈이 눈에 들어왔다. 추운데 여기서 뭐해? 하는 지훈의 한없이 다정한 목소리에 왈칵 눈물이 차올라 고개를 다시 푹 수그렸다. 이 다정함은 친구라서겠지? 그때의 넌 하나도 다정하지 않았으니까….

 

“우진아.”

 

제발, 그렇게 다정하게 좀 부르지 마라. 헷갈리니까, 흔들리니까. 어차피 넌 안 받아줄 거잖아. 그러면 조금의 희망도 주지 마. 아니면 네 말 하나, 네 행동 하나에 울고 웃는 날 보는 게 즐거워서 그래?

 

점점 더 무릎에 파묻히는 우진의 머리통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지훈이 우진의 앞에 마주 보고 쪼그려 앉았다. 그리곤 손을 들어 올려 동그란 우진의 머리통을 살살 쓰다듬다 양손 가득 우진의 머리를 살며시 그러쥐곤 조심스럽게 제 입술을 가져다 댔다가 뗐다.

 

“이 말 하기까지 엄청 오래 걸렸는데, ……좋아해, 우진아.”

 

지훈의 말에 우진의 몸이 크게 흠칫 떨렸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린 우진은 제 앞에 얼굴을 마주한 지훈을 노려봤다. 지훈은 험상궂게 일그러진 우진의 얼굴을 예상했다는 듯 빙긋, 눈을 접어 웃어 보였다. 그리곤 다시 한번, 좋아해, 박우진. 하고 조그맣게 속삭였다. 그에 우진이 얼굴을 한 층 더 일그러트리더니 개소리 작작해. 하고 말하자 지훈이 장난스레 상처받은 표정을 지어 보이며 진짠데, 하고 대답했다.

 

“넌 내가 우습냐?”

“아니.”

“그럼 동정해? 차이고 또 차여도 고백하는 내가 불쌍했어?”

“아니.”

“그것도 아니면 그냥 나 놀리는 게 재밌어서 그래?”

“아니.”

“그럼 뭔데! 뭔데 갑자기 이러는데!”

“좋아한다고, 했잖아.”

 

우진은 저를 똑바로 바라보는 지훈의 눈빛을 마주하며 벙긋거리던 입술을 꽉 깨물며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더 말하면 욕밖에 안 할 거 같아서. 마음에 있는 소리, 없는 소리 다 할 거 같아서. 나도 상처받고 너도 상처받을 거 같아서. 내 마음을 가지고 농락하는 너를 앞에 두고도 난 여전히 네 생각을 하고 있다. 미련하게도.

 

“그럼 그땐 왜 찼는데… 어? 말해봐라.”

“……넌 그때 우리가 사귀는 게 맞았다고 생각해?”

“뭐?”

“너 가수 되려고 자그마치 7년. 7년 동안 춤췄잖아. 나도 너만큼은 아니지만 죽어라 노력했어. 가수 되려고.”

“…….”

“…그런데도 안 돼서, 어떻게든 살아남아 보겠다고, 발버둥 쳐보려고 거기 나간 거잖아. 그렇잖아.”

“…….”

“나도, 나도 쭉 너 좋아했어. 같이 데뷔해서 진짜 너무 기뻤고. 근데! 사랑을 많이 받는 만큼 찍혀 나가는 것도 금방이더라. 그걸 눈앞에서 보는데 너무 무섭더라고. 말 한마디 내뱉는 것도 조심스러운데… 우리가 조심한다고 해도 누군가에게 들킬 수도 있는 거고… 그랬다가 너도, 나도 꿈도 사랑도 다 잃을까 봐 그게 너무 무서웠어. 그래서 네 고백 매번 장난으로 넘겼고, 침묵으로 거절했어. 시간이 지나면 이 내 감정이 사라지겠지, 괜찮아지겠지, 그 생각으로 외면하고 또 외면했어.”

“…….”

“근데… 근데, 그게 안 돼, 우진아….”

“……하.”

“네가 날 안 보니까 미치겠고, 네가 나 말고 다른 사람을 좋아하게 될까 봐 초조했고, 네 마음속에서 내가 영영 사라질까 봐 두려웠어….”

“이기적인 새끼.”

 

얼굴을 잔뜩 일그러트린 우진이 양손에 주먹을 꽉 쥔 채 지훈을 노려봤다. 그런 우진의 시선을 지훈 역시 피하지 않고 오롯이 마주 바라봤다. 진심이라고 울부짖는 것 같은 지훈의 눈동자에 우진은 애꿎은 입술만 꽉 깨물었다. 이 와중에 속도 없이 좋다. 춥다며 제 몸에 덮은 옷을 여며주는 박지훈이, 인상 쓰면 주름 생긴다며 제 미간을 살살 문질러 펴는 박지훈이, 저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박지훈이, 끝까지 이기적인 박지훈이 속도 없이 좋다.

 

“응, 맞아. 나 이기적이야. 그러니까 우진아… 나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이기적으로 굴게.”

“…….”

“좋아해, 사랑해, 나랑… 사귀어주라.”

 

그 말을 끝으로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박지훈의 얼굴에 우진은 마치 단념이라도 한 듯 길게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곧이어 말캉한 감촉과 함께 맞닿는 코와 입술에 우진이 살며시 고개를 틀자 지훈의 투박한 손이 우진의 뒤통수를 감쌌고 그에 맞춰 우진이 살며시 입술을 벌리자 지훈의 혀가 잽싸게 그사이를 파고 들어왔다.

 

아아, 그래…. 이기적인들 어떠리, 내가 원하는 것을. 잊으려 했으나 잊히지 않는 것을 어쩌리, 그저 사랑할 수밖에. 박지훈이 내게 왔으면 됐다고, 그거면 됐다고,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몸도 마음도 차게 식어갔던 작년 겨울과 달리 올 겨울은 아마도 따뜻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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