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왜 이제 들어와. "
" 나 늦는다고 말했어. "
우진을 느리게 바라보는 영민의 눈이 싸늘하다. 애정이 담겼던 예전과는 매우 다르기만 하다. 우진은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별 다른 말을 꺼내지 않았다. 꺼낸다고 하여 무언가 달라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까. 등만 보이는 영민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차가운 소파로 향하는 우진이다.
" 춥다. "
그저 겨울이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많이 차가워진 그의 태도 때문이었을까. 우진은 쿠션을 꼬옥 안아가며 따뜻해지려고 애썼다. 꼭 닫힌 문이 관계 단절을 의미하는 것과 같이 느껴져 괜히 서글픈 우진이었다. 한결같은 사람이 되어주겠다며 옆에 있어준 것이 벌써 5년이다. 어떻게 사람이 안 바뀔 수가 있겠느냐만, 그래도 영민은 현저히 다른 사람과 같았다. 전에는 눈시울이 붉어져 눈물이 또르륵 흘러나왔다지만, 지금은 그러지 않았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익숙해져버린 것일까. 그래도 찬 옆자리가 여전히 슬프기는 했다. 말을 꺼내면 싸우게 될까봐 우진은 아무렇지 않게 영민의 곁으로 가 영민을 끌어안으며 잠에 들고자 했다. 널찍한 영민의 등이 오늘따라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닿지 않는 것만 같아 우진은 괜히 더 영민의 등을 꽉 끌어안았다.
" 오늘은 일찍 들어와? "
" 글쎄. 왜? "
" 아니야.. "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기는 해? 차라리 서프라이즈 라고 모른 척을 했던 거라면 훨씬 좋았을 텐데.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는 영민의 표정이 생각보다 아니꼽다. 밥 먹을 때마저도 저를 한 번도 바라보지 않는 영민이 미웠다. 예전 같았으면, 투정으로라도 혀엉-, 왜 나 안 봐- 응? 이제 보기 싫어? 밥이랑 사귀어! 이랬을 텐데. 내 나이가 먹어서 인가 우리의 연애가 나이를 먹어서 인가. 그런 행동은 죽어도 못할 거 같았다.
" 나 늦게 들어오면, 그냥 먼저 자. 괜히 기다린다고 날 세우지 말고. "
내가 언제 날 세웠다고. 욱하는 성질을 막고 또 막으며, 입가에 미소를 띠려고 했다. 임영민은, 형은, 내 애인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슬쩍 보고는 현관문으로 향했다. 전에는 그런 형에게 사랑해. 잘 다녀와. 이랬을 텐데. 지금은 그러지도 못할 거 같았다. 과연 나는 임영민을 사랑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저 익숙함에 놓지 못하는 것일까. 혹여 형도 그런 것일까. 영민이 나간 현관문을 보며 우진이 손을 살짝 흔들었다.
- 하하, 그러면 유리 씨는 언제 애인이 본인에게 마음이 뜬 거 같다고 생각해요?
- 음, 저는 애인의 눈동자에 제가 담겨있지 않을 때?
- 그럼 성민 씨는요?
- 함께하는 일상이 전과 같지 않을 때인 거 같네요.
- 그렇군요. 뭐든 생각만 하면 너무 슬프네요.
틀어둔 텔레비전이 아무렇게나 떠들어댄다. 임영민은 현재 저 사람들이 말한 거에 다 속한다. 그렇다면 임영민은 나에게 마음이 없다는 것일까. 죽어갈때나 주마등이 스쳐지나간다는데 착잡한 마음에 임영민과 보낸 연애가 주마등마냥 스쳐지나간다. 약간 슬픈 것을 보니 난 아직 마음이 제대로 뜨지는 않은 거 같다.
- 성민 씨는 슬플 때가 언제인가요?
- 저는 애인 혼자 마음 정리를 한 상태에서 절 마주보는 거라고나 할까요.
- 그렇다면 유리씨는?
- 성민 씨랑 비슷한데요. 음 저는 그런 애인을 보면서도 제 마음을 정리 못할 때가 슬픈 거 같아요.
나도 모르게 눈물을 뚝 흘렸다. 슬프다 라는 감정을 뇌로 보내기도 전에 눈이 먼저 반응을 했다. 질문에 답을 하는 게 나인 것 마냥 서글프게 울었다. 익숙해졌다고 떠나가는 임영민 자체에게 익숙해진 건 아니었다. 나는 아직 보낼 준비가 된 게 아닌데도, 이미 형은, 나를. 바닥을 적시는 눈물이 금세 차가워졌다. 겨울이어서 인가. 아니면 우리의 연애가 겨울을 거치게 되어서 일까. 임영민이 보고 싶었다. 임영민의 눈동자에 내가 담긴 것을. 임영민과 함께 하는 미래를. 그 작은 것을 원한다는 게 이렇게 아픈 일 일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이별은 남들 일이라고 생각했다. 절대 내 일이 될 수는 없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해왔는데. 우진은 바닥에 떨어진 눈물을 치워낼 생각도 않고 휴대전화의 키패드를 두드렸다.
- 형, 임영민, 헤어지자.
우진은 이별을 고했다. 정리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내뱉는 이별은 겨울에 내리는 눈보다도 찼다. 그 겨울은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