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합작 가을 윙참팤
[윙참팤] 환절기
‘환절기 감기조심하세요~’
옛 드라마에서 나올법한 뻔하고 유치한 멘트인 것 같은데 이런 구식 멘트를 공중파 뉴스에서 다 하네. 아니 예전에 한 여배우가 하면서 유명해진 멘트인가.. 평소 같았으면 아무렇지 않게 채널을 돌리며 ‘당연한 말을 굳이 정성들여하네..‘ 라고 생각하며 넘겼을 한마디가 왜 이렇게 귀에 맴도는지. 좀 귀담아 들을걸 그랬나..
심한 감기에 걸려서 며칠을 앓아누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침대에 가만히 누워 천장을 바라보기만 해도 눈앞이 빙빙 돌아갈 정도로 손 하나 까딱할 수 없는 그런 감기.
선선해진 날씨에도 편안한 게 최고라는 쓸데없는 신념을 지키고자 주워 입은 반바지에 반팔이 문제였을까, 밤낮으로 심한 일교차에도 불구하고 활짝 열린 창문아래서 이불도 없이 잠들어서 일까. 가만히 누워 어쩌다 감기에 걸렸을까 생각을 해보다 다시 아파오는 머리에 눈을 감는다. 열이 올라 뜨거워진 온몸과 붉어진 눈가에 감은 눈꺼풀 사이를 다시 또 비집고 눈물이 나오려한다. 들뜬 열 때문에 뜨거워진 눈시울에 생리적 현상으로, 혼자 아파 누워있어야 하는 게 서러워서, 핑계를 대려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더 이상 이런 일로 잔소리 해줄 사람이 없어서 그게 제일 쓸쓸해서. 들을 사람 아무도 없는 텅텅 빈 집이지만 행여 누가 들을까 괜히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소리 내서 엉엉 울어본다. 점점 더 열이 올라 이불 속 공기가 답답하고 뜨겁게 변하는 게 느껴졌지만 그 상태 그대로 지쳐 잠들어 버린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다시 혼자가 되어버린 쓸쓸하고 추운 가을의 첫 시작이었다.
“..진아..! 박우진! 정신차려봐!!”
“...어.. 형..”
“무슨 땀이 이렇게.. 어디아파?”
“어.. 진짜네.. 영민이형..”
“갑자기 왜 울어 많이 아파? 어디가 아파 머리? 목? 나가서 약 사올까?”
“아니 형 가지마.. 나랑 있어.. 나 안 아파”
어젯밤 들뜬 열에 지쳐 잠든 몸에 늦은 시간까지 일어날 생각을 못하고 자고 있는데 누군가 흔들어 깨우는 느낌에 떠지지 않는 눈을 떴을 때에, 지금까지 계속 그리워하던 그 얼굴을 마주했을 때의 그 느낌. 만약 다시 만나게 된다면 울지 말자고 다짐했던 그 마음은 다 사라지고 눈앞에 보이자마자 그립던 품에 파고들 수밖에 없었다. 이미 그동안 많이 울었던 탓에 눈이 팅팅 붓고 붉어져 나오는 눈물 한 방울 한 방울마다 눈이 따갑고 쓰렸지만 그게 무슨 대수라고, 내 눈앞에 형이 있는데 그게 무슨 상관일까. 그리움과 서러움에 계속 흐르는 눈물을 아무렇게 소매로 닦으려고 하니 손을 잡아 말리고선 다정하게 자기 손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는 형에, 그제서야 드는 안도감에 조금은 미소가 생긴다.
“형 지금 이거 꿈 아니지?”
“꿈은.. 아니야 우진아”
“그럼 됐어. 형 지금 몇 시야?”
“벌써 한 시도 넘었어.. 배 안고파? 울어서 머리는 안 아프고?”
뭐가 그렇게 걱정이 되는 건지. 침대에 앉아있는 자기와는 다르게 침대 밑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올려다보며 볼을 만졌다 이마에 손을 갖다 대는 형의 모습이 오랜만에 보는 형의 모습이 조금은 웃겼다.
“정말 괜찮아 형 있으면 하나도 안 아파”
“그래도..”
“그렇게 걱정되면 나랑 조금만 더 같이 누워 있어줘 나 졸려..”
약하게 이마에 놓인 형의 손을 떼어 침대로 끌어당기자 조금 놀라는 모습이 보였지만 형을 끌어올려 옆에 눕히고 자연스럽게 그 옆에 누워 끌어안았다. 지금 이순간이 얼마나 바래왔던 순간이었는지 아마 형은 알까? 매일 밤 옆이 허전해 잠 못 이루던 그동안의 밤들이 무색하게 졸음이 몰려오는 이 상황이 너무 포근한 느낌이랄까.
“형 이거 꿈 아니잖아”
“..응 우진아 졸려?”
“응.. 그럼 나 눈떴을 때도 옆에 형 있는 거지?”
“..그래 옆에 있을게.. 한숨 자”
잠에 취해 아득히 들려오는 대답에서도 옆에 있겠다는 한 마디에 안심이 되어 머리며 등을 쓸어주는 손길을 느끼며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실로 오랜만에 그동안 밤마다 괴롭히던 불면증이 사라지고 나를 떠나가던 형의 뒷모습이 반복되던 악몽이 아닌 아무런 꿈도 꾸지 않는 편안한 잠이었다. 눈을 떴을 때도 형이 있을 거란 바람과 함께.
“으,음- 혀엉... 형.. 영민이형?”
오랜만에 푹 잠들었다 깨어난 기분 좋은 느낌에 익숙하게 습관적으로 팔을 뻗어 옆자리를 쓸었는데 또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는 공허한 느낌. 비어있는 옆자리의 찬 공기가 손끝을 타고 올라와 온몸의 차갑게 식는 느낌. 발작적으로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또 형이 사라졌을까 무서워서 형이 덮어줬던 이불은 침대 위 한쪽 구석에 구겨져 버려두고 눈앞에 보이는 문을 힘껏 열었다. 눈뜨면 옆에 있겠다고 했잖아.
“형!”
“응? 우진아 깼어? 잠깐만 기다려봐”
“형 뭐해..? 눈뜨면 옆에 있기로 했잖아..”
“아.. 미안미안.. 그래도 밥은 먹여야할 거 같아서. 아까 열 많이 나던데 약 사왔어 죽 먹고 약 먹자”
“..형.. 고마워”
“...우진아 가서 앉아있어 다 됐다”
눈을 떴는데 아직 형이 옆에 있다. 또 혼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또 다시 사라져 버릴까봐 나를 두고 가 버릴까봐 불안감에 덜덜 떨며 놓지 않겠다는 듯이 뒤에서 형을 안고 있자 불안해하지 말라는 듯이 조심스럽게 손을 잡고 떼어내고선 머리를 쓰다듬어오는 손길에 언제 그랬냐는 듯 불안감이 사르르 녹아 없어진다.
식탁 의자에 앉아 발을 동동 구르면서 형 뒷모습을 바라보는데 아까 놀랬던 마음과는 다르게 실실 웃음이 새어나온다. 누구 애인인지는 몰라도 진짜 멋있기는 멋있네. 익숙하면서도 또 오랜만이라 그런지 낯선듯한 뒷모습에 괜히 행복해서 양손으로 턱을 괴고 형을 쳐다보고 있으니까 죽 한 그릇을 떠와 앞에 내미는 형의 모습에 그만 웃어버렸다.
“왜 웃어?”
“아니 그냥 너무 좋아서”
“실없긴.. 얼른 먹어 먹고 약 먹자”
“형이 끓여주는 죽은 또 처음이네”
“응..? 응.. 그치..”
“고마워 잘 먹을게”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하얀 쌀죽 한 숟가락 가득 떠 호호-부니 걱정스런 표정으로 앞에서 쳐다보는 형이 보였다. 누가 봐도 맛없으면 어쩌나 한껏 초조해 하는 표정이라 놀려줄까 하는 마음으로 괜히 한 입 먹고는 할 수 있는 힘껏 표정을 찡그리니 아니나다를까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는 형이 보였다.
“왜? 맛없어?”
“좀.. 응..”
“진짜? 아까 살짝 먹었을 땐 괜찮았는데.. 맛없으면 뱉어 아- 나가서 죽 사올까? 먹고 싶은 거 있어?”
“아 진짜.. 형 장난이야! 완전 맛있어! 형 원래 요리 잘 못하지 않았어? 뭔가 전에 한번 먹어본 것 같은 맛이다.. 맛있어 고마워”
형이 원래 이렇게 요리를 잘했었나.. 간단한 계란후라이도 하려고 하다가 태워먹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여서 웬만하면 요리는 어디가서 하지 말라고 내가 얘기했었던 것 같은데. 괜히 나한테 해주려고 노력한 거 같아 누군가에게 사랑받는다는 행복감이 이런걸까..
“우진아”
“응?”
“웃으니까 보기 좋다. 요즘 한참 못 웃는 거 같아 걱정했는데..”
“응? 요즘?”
“아니 그냥 웃는 게 좋아서”
“뭐야.. 아! 맞다 형 근데 향수 바꿨어?”
“아니? 무슨 향수?”
“아니 그냥 아까.. 형 평소에 쓰던 거랑 향이 좀 달라진 거 같아서”
“글쎄.. 난 잘 모르겠는데?”
“아닌가? 아님 말구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어.”
그렇게 우리가 언제 이별을 했냐는 듯이 형은 매일같이 나를 찾아왔고, 찾아왔던 감기는 언제 아팠냐는 듯이 싹 나아 나를 떠나갔다.
빠르게 찾아온 가을의 쌀쌀함처럼 찾아온 가을처럼 넓은 칫솔꽂이에 덩그러니 있던 칫솔 하나가 두 개가 되고, 쓸쓸히 현관 앞자리를 지키던 실내화 한 켤레가 다시 두 켤레가 되고, 설거지할 그릇이 배로 늘어나고, 생활하는 공간 하나하나가 다시 두 사람의 공간으로 바뀌어가는 시간은 제법 짧고 빨랐다.
“형!”
“우진아.. 제발 따뜻하게 좀 입고 다니라니깐... 저번처럼 감기걸릴려고..”
함께 지내는 공간을 벗어나 오랜만에 밖에서 만나는 형의 모습에 신나서 달려가니 반겨주려다 한숨 쉬는 형의 모습이 보였다.
누가 들으면 미쳤다고 할지도 모르지만 누군가한테 잔소리를 듣는다는게 누가 나한테 관심을 준다는게 이렇게 기분 좋은 일인지. 형이 뭐라고 말을 하던 걱정해주는게 좋아서 웃으며 쳐다보니 모르겠다는 듯이 한숨을 다시 쉬더니 말없이 챙겨온 옷을 꺼내는 형에 입꼬리가 점점 더 올라간다.
“쌀쌀한데 반팔입고 다니면 감기 걸려. 이거라도 걸쳐 얼른”
“형.. 근데 이 옷 어디서 산거야?”
“왜.. 이상해..?”
“어 완전. 박지훈 같아 뭐야 이게”
“ㄱ.. 그래?”
“응.. 형 옷 아닌 것 같아..”
형 옷 스타일이 이런 느낌이 아니었는데? 걸치라며 건네준 후드 집업이 평소에 옷 못 입는다고 놀리던 박지훈 옷장에서 볼만한 옷이라서 내가 못 본 사이에 옆에 없었던 그 짧은 시간에 형의 취향이 바뀐건지.. 내가 모르는 형의 부분이 생긴 것만 같아서 왜인지 쓸쓸한 기분이 들어온다. 형에 관한 건 다 알고 있다고 자부했는데 그 자신감이 한순간에 사라진다.
“박우진! 우진아.. 이불 좀 제대로 덮고 자라니깐..”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해줄까?”
형은 내가 알고 있던 형이 맞는 걸까.. 자신감이 사라져서인지 아니면 정말 내가 그동안 형을 잘못 알고 있었던건지 성까지 붙여 내 이름을 부를 때, 요리를 해준다고 할 때, 늦은 밤 혼자 있기 쓸쓸한 밤에 같이 있자고 말할 때 어색해 하며 온갖 핑계를 다 대며 집으로 돌아가는 형의 모습. 어떤 게 진짜 형이야? 그동안 내가 알던 모습이야 아니면 지금 모습이야?
점점 형을 관찰하는 하루가 늘어갔다. 입는 옷, 먹는 음식, 나오는 말투 다시 만났다는 커다란 행복감 뒤에 숨어 어쩌면 사소한 하나하나를 놓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내가 알던 형의 모습이 아닌 순간이 하나하나 나올 때마다 생각을 거듭한다.
낯선 체향을 맡았는데 누가 생각나는데.. 입는 옷이 누가 생각나는데.. 누구였지.. 큰 행복감 뒤에 소중했던 누군가를 잠시 잊고 살아온 것 같은데..
오랜만에 형이 없는 조용한 집안에서 형의 물건들을 바라보며 가만히 생각해본다. 저 옷 분명히 어디서 많이 봤는데, 분홍색 칫솔 취향이 누가 있었는데 하나하나 기억을 더듬어 갈 때쯤 익숙한 여섯자리 다이얼 소리에 고개를 돌려 현관을 보니 드디어 미친거지 내가.
“어? 우진아 일어나있었네? 어제 여기 만두먹고 싶다며 사왔어 같이 먹자”
“아닌데..”
“응?”
“나 그거 영민이 형한테 말했는데.. 어떻게 알아?”
“우진아 그게 무슨..”
“박지훈 그걸 니가 어떻게 아냐고.”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 당황으로 바뀌더니 지훈의 손에 들려있던 검은 봉지가 차가운 현관 바닥에 툭 떨어진다.
“뭐야 지금 이거? 장난치는 거지? 형 어딨어?”
“우진아..”
“영민이형 어디있냐고 묻잖아!!”
“우진아 그게 아니라 잠깐만..!”
나를 향해 뻗어오는 저 손이 박지훈 손인데 아니 영민이 형 손인가? 지금 내 눈에 보이는 건 박지훈인데 그 위로 겹쳐 보이는 모습은 영민이 형인데 뭐야 누구야 누가 맞는 거야.
“가까이 오지마!!”
“....”
“박지훈이잖아.. 그럼 그동안도 계속 박지훈이었던 거야?”
“우진아 일단 진정하고 내말 좀 들어봐..”
“아니.. 나 혼자있고 싶어 나가줘”
무언가 더 말하고 싶지만 손을 내리고 뒤돌아 나가는 너의 모습이 보인다. 뒤돌아 나가는 와중에도 손을 내리는 그 짧은 순간에도 나를 걱정하는듯한 표정이 보여서 영민이 형이 아니라 박지훈 너인데 왜 그 표정하나가 신경이 쓰이는 걸까..
너를 그렇게 내쫓아 버리고서는 다시 쓸쓸한 집에 혼자 남았다. 넓진 않지만 그래도 쓸쓸함이 느껴지는 집을 돌아보며 형과 함께했던 추억들을 머릿속에서 꺼내본다. 집밖에 나가기 귀찮아서 둘이 같이 이불을 뒤집어쓰고 영화를 보고, 집 밥이 그립다고 하면 같이 준비해서 서로 자신있는 요리 해주기도 하고, 그러다 찬찬히 생각을 다듬어본다. 형과 함께 한 것이라 생각했던 그 추억하나하나가 형은 없어도 집안에 남아있다고 생각한 형에 대한 기억이 이제는 더 이상 없다. 그동안 형인줄 알았던 너와 함께 했던 추억들이 집안 곳곳에서 생각난다.
나는 임영민이란 사람이 돌아와 내 옆에 있다는게 행복했던걸까 아니면 나를 신경써주는 누군가,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에 행복했던걸까.
한동안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 날 이후로 너는 미안한 마음에 매일같이 전화나 문자를 통해 연락해왔고 나는 그 연락을 번번이 피했다.
그렇게 너를 피해서 생각을 거듭할수록 시간이 지날수록 후자로 정리되는 마음에 때마침 울리는 핸드폰을 잡아들었다.
“안녕 잘 지냈어..?”
“이제 낙엽 다 떨어져가네.. 뭔가 쓸쓸하다 벌써 겨울 오는 거 같네..”
오랜만에 만난 너는 역시나 미안한 마음에 어색하게 인사를 해왔고 나는 그런 너를 보고는 아예 다른 말을 꺼냈다. 그동안 있었던 일을 의식하지 않고 죄책감을 가지지 않고 임영민이라는 가면을 벗고 박지훈이란 사람이 평소처럼 나를 그냥 박우진으로 대해줬으면 하니까.
그런 내 마음을 알아차린건지 아니면 너도 나와 같은 생각인건지 더 이상 묻지 않고 평소와 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너의 모습에 괜한 걱정을 했던 마음이 놓인다.
“박우진 내가 따뜻하게 입고 다니라고 했지. 너 또 감기 걸려서 골골댈래??”
“아니 따뜻하게 입은건데..”
“잠깐만 기다려봐.”
만날 때부터 가방에 뭐가 들어있나 궁금했는데 뭐가 그렇게 많아서 빵빵한지 아까부터 터질 것 같은 가방에서 돌돌말린 뭔가를 꺼내는 너였다.
오랜만에 만난 너에게 여전히 나는 너의 불편함을 감수하더라도 넘어설 정도의 사람이구나. 그정도로 지금의 나는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있구나.
“아아 뭔 가을부터 목도리야”
“시끄러워 추우면 하는 게 목도리지. 목도 휑해가지고 빨리 이리와”
“아 진짜 싫은데.. 박지훈 취향하고는 이게 뭐냐 진짜”
“그러니까 따뜻하게 좀 입고다녀 그러면 누가 뭐래?”
“배고프다..”
“말돌리지 말고 알겠어?”
“오늘 영화 뭐본다고 했지?”
“.. 말을 말자 맘대로 해”
내 마음을 알고나서 가지는 만남이여서 그런지 가까워진 너와의 거리로 인해 느껴지는 부끄러움에 괜히 말을 돌려본다.
너는 그런 나를 잘 안다는 듯이 한숨을 쉬며 맘대로 하라고 말을 하고선 앞장서 가버린다. 맘대로 하라고 말을 했지만 너도 알고 나도 안다.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건 나보다 나를 더 걱정하고 챙길 너란걸 그래서 어쩌면 더 말을 하지않고 넘어가는 걸지도 네가 나를 챙길거란걸 너 스스로도 잘 아니까.
그런 너니까 이런 나라도 계속 신경써주고 좋아해줄 너이고 그런 너한테 고마운 마음과 내 마음을 너무 늦게 알아버린 나니까. 무슨 말이라도 해주고 싶어서 먼저 걸어가는 너의 옷자락을 조심스럽게 잡아본다.
“지훈아.. 고마워”
“무슨 소리야 갑자기?”
“아니.. 그냥 고맙다고 오늘 목도리도 고맙고 매번 나 챙겨주는 것도 고맙고 그냥 다”
“됐어 그냥 내가 좋아서 하는건데 뭐”
“그게 제일 고맙다고..”
“..뭐?”
“뭐해 안가? 영화 안 봐?”
“어.. 어 가야지”
놀란 너의 표정에 괜히 민망해져 너를 쳐다보지 못하고 너를 조금 제쳐 앞으로 걸어가려다 조심스럽게 네 손위에 내 손을 겹쳐 잡아본다. 더 놀라는 네 모습이 눈에 선했지만 부끄러운 마음에 내 스스로 너를 볼 자신이 없다. 그러다 너를 이끌며 살짝 고개를 들어 올렸을 때 마주친 시선에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서로의 눈을 피하는 우리완 다르게 사이에서도 잡혀진 손은 놓지 않는다. 어쩌면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환절기처럼 우리의 관계도 바뀌어간다.
풍성한 가을의 시작과 함께 한 쓸쓸한 마음에 보답이라도 받듯, 낙엽이 거의 다 떨어져 쓸쓸해져가는 가을의 끝자락 나는 또 다른 사람으로 서서히 차올라 풍성해진 마음으로 가을의 끝을 보내준다.
그렇게 나의 가을은 시작되었고 나의 가을은 끝을 향해 달려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