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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민현은 운명을 믿지 않았다. 무언가 결과가 나오는 데에는 이유가 있고, 노력만 있으면 충분히 결과를 뒤집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산 지 벌써 10년이 넘었다. 중학교 첫 시험에서 50점을 받고 나서 그게 니 실력이라고 못박은 선생님에게 다음 시험엔 100점을 만들어 가져갔고, 그 대학교는 무리라고 말하는 친구에게는 기어코 합격 페이지를 찍어 보내줘 고개를 젓게 만들었다.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어가는 인생에 자신감이 붙은 민현은 대학에서도 과탑과 장학생을 목표로 열심히 공부했으나, 민현이 가진 것으로만 뒤집기엔 세상은 조금 불공평했다. 

 

“이번 과탑은 역시 상수형인가?”

“민현이도 엄청 열심히 했잖아.”“교수가 고상수 팬인걸 어떡하냐. 진짜 민현이도 참.”

 

대화의 주인공 없이 떠들던 사람들이 뜻밖의 인영에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다 알고 있었던 얘기라 별로 큰 감흥은 없었다. 2인자 황민현. 노력은 하는데 운이 없는 황민현. 다들 민현을 동경하면서도 동정했다. 그것도 술자리나 가끔 지나가다 한 번씩 던지는 싸구려 동정이었지만. 여름방학이 끝나고 2학기가 들어 취업 준비로 바빠 그나마 상황이 조금 나아졌다. 정신 없이 공부에만 매달리다보니 사람들과 얼굴을 자주 부딪히지 않아도 되었고, 게다가 다들 졸업반이 가까운 입장이라 안줏거리 삼을 이슈에 큰 에너지를 쏟지 않았다. 그래도 저런 식으로 가끔 소환당할 때가 있긴 하지만.

 

 

“아 맞아, 오늘 우진이도 온대.”

“우진이가 누군데?”

“왜, 그 덧니 있는.”

 

역시나 주제는 올해 들어온 신입생에게로 돌아갔다. 이미 반 학기 지나서 신입이라고 하기 뭐 하지만 그래도 1학년이니까 톡톡히 신입의 특권을 누리고 있는 중이었다. 민현은 우진을 알았다. 대충. 키는 안 큰데, 애가 매사에 열심히해서 그런지 그닥 작아보이지 않고, 사람들 모여있는 곳에선 과묵한 것 같다가도 또 대화를 이끌어나갈 땐 에너지가 넘치는. 정말 민현과 영원히 안친해질 것 같은 타입. 개총 때 한 번 봤고, 그 이후로 지나가다 마주치면 인사를 받는게 다 인, 딱 거기까지의 선후배관계. 민현은 우진의 얼굴을 곱씹다 금방 책으로 고개를 박았다.

 

낙엽이 땅을 덮어 붉게 수놓은 광경은 마치 어디로 향하는 레드카펫같다. 그래서 민현은 가을을 좋아한다. 맨 땅을 밟을 때와는 다른 푹신한 느낌이 뭐가 되었든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 같아서. 그렇게 걷다가 우진을 만났다. 아니, 보았다고 하는게 더 정확한 표현이긴 하겠다.

 

박우진은 벤치에 앉아있었다. 민현도 우진에 대해선 아는게 이름과 얼굴, 그리고 나이 뿐이라 그닥 인사를 먼저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우진이 말을 걸면, 그거 나름대로 좀 귀찮을 거 같기도 했다. 하필 다음 수업은 우진의 앞을 지나가야 나오는 건물에서 듣기 때문에 최대한 보폭을 좁혀 걸음을 늦췄다. 혹여나 수업시간이 가까워져 우진이 일어나 갔으면 해서.

 

“...내 생일 또 까먹었나. 저번주에 얘기 했는데.”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오는 거리가 되었을 때 귓가로 아직은 앳된 톤의 말이 꽂혔다. 이어폰을 꽂은 채 노래를 듣는 줄 알았더니 전화 중이었던 듯 했다. 그런데 대화 내용이 영... 여기서 진짜 만나면 어색해 질게 뻔한 그런 전개였다.

 

관심을 안가지려고 했는데, 솔직히 저런 대화를 들으면 호기심이 가기 십상이다.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드니 떨리는 속눈썹을 한 옆모습이 보였다. 생긴건 당장에라도 통화를 끊어버리고 욕을 할 것 같았는데, 의외로 참 모질지 못한 구석이 있는 듯 했다.

 

사람들 사이에선 한없이 해맑은 아이. 늘 활기찬 아이로 눈도장을 찍고 다닌 주제에 뒤에서 다 타들어가 검어진 속을 꺼내볼 줄은 몰랐지. 민현은 그리고 정말 우습지만, 쟤랑 나랑 비슷한가? 라는 생각을 했다. 주변 사람들이 멋대로 내린 정의에 갇혀 이리저리 뒤틀린 성질을 힘껏 눌러 담느라 에너지를 쏟는 부류 말이다. 민현은 구두 앞코로 새빨간 단풍잎을 이리저리 땅에 비볐다. 우진의 말이 점점 짧아졌다. 통화가 끝나가는 듯 했다. 낙엽이 바스라졌다.

 

 

“생일인가봐?”

 

핸드폰을 내린 우진이 깜짝 놀라 고개를 틀었다. 충동이었다. 본래 모든 일을 두 번 이상 생각하고 행동하는 민현 답지 않았다. 그래서 말을 내뱉자마자 입술을 말아 물었다. 괜시리 머쓱해졌기 때문이다.

 

“아... 안녕하세요. 민현이 형.”

“엿들은 건 아니고, 나 수업가다가.”

“아녜요. 뭐 대단한 내용이라고.”

 

우진이 예의 그 대외용 미소를 지어보였다. 올라간 입꼬리에 걸린 덧니가 삐죽 튀어나왔다. 황민현은 대답 대신 함께 웃어주었다.

 

“내일이 생일인데, 어째 매번 생일이 혼자네요.”

 

미소는 이내 씁쓸해졌다. 그런 우진을 보던 민현이 시계를 한 번 보았다. 이미 수업시작 시간이 지나있었다. 아마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 좁은 공간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 한 번씩 저를 쳐다 볼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그게 싫어서,

 

“너 오늘 시간 있어?”

“네? 저... 진형이형이랑, 준우형이랑...”

“우진아, 형이랑 생일 파티할래?”

 

 

얘한테 단순하게 동정을 베푸는 거라고... 그렇게 합리화를 했다. 하지면 결론적으로, 모든 관계를 뒤흔드는 최초의 한 마디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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