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성 완료」
보내는 사람 : YM951225@email.com
받는 사람 : WJ991102@email.com
2018. 11. 02. / PM. 12 : 25
잘 지냈어? 메일 많이 기다렸지. 아무 말 없이 갑자기 며칠 동안 안 보내서 가지고 미안해. 바쁜 일이 생겨버려서 급하게 처리하느라.
한국은 이제 가을 날씨라고 들었는데, 아침저녁으로는 쌀쌀하고, 낮에는 조금 후덥다고. 이런 날씨가 감기 걸리기 딱 좋다고도 들었나. 감기 걸리시지 않았는지 걱정되네. 낮에는 좀 덥더라도, 아침저녁을 위해 따듯하게 입고 다녀.
싱가포르는 한국이랑 비교하자면 여전히 더워. 검색해보니깐 한국의 여름 날씨가 싱가포르의 가을 날씨더라. 참 날씨가 다른 걸 여기서 실감했어.
혹시, 우리가 언제 이렇게 메일을 주고받기 시작했는지 기억해? 실수로 만들어진 인연이었잖아. 우진이 네가 메일주소를 잘못 쓰는 바람에 생긴 운명 같은 해프닝.
음… 아마 오늘 편지는 많이 길어질 것 같아. 평소 메일 길이에 한 10배 정도? 갑자기 왜 이러나 싶기도 할 거고, 귀찮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 하지만 꼭 하고 싶은 이야기라서 말이야. 만약에 너무 읽기 너무 힘들다 하면; 마지막 문단. 딱 마지막 문단만 꼭 읽어줘 우진아.
일단, 우진이 네가 알다시피 난 싱가포르에 살아. 한국인이지만 싱가포르 국적. 5살 때까지는 한국에서 살다가 싱가포르로 넘어온 유형. 아마 저번에 이야기해 줬을 거야. 부모님께서 제가 한국어를 까먹는 걸 원치 않으셔서, 집에 있을 때나 가족끼리 있을 때는 한국어로 대화한다는 것도 알려줬을지 모르겠네. 어쨌든 그래. 하지만 아무래도 외국에 살다보니, 한국어는 쓰거나 말할 기회가 그리 많지는 않고, 성인이 되고 나서는 독립하는 바람에 결국 한국어를 할 시간은 아예 사라졌어. 한국은 호감을 느끼고 있는 나라였고, 한국어도 재미있고 그래서 잊지 않기 위해 나름 노력했지만… 바쁘다 보니 한국어를 점점 잊어가고 있었지.
그러다가 우진이 너한테 메일이 온 거였어. 네가 주소를 잘못 써서 실수로 저한테 보낸, 그 메일이 말이야. 작년, 이 맘 때였지 아마.
처음에는 굉장히 당황했어. '뭐지, 신종 스팸인가?' 싶었지. 읽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도 굉장히 고민했어. 혹시 바이러스 퍼지는 건 아닐까 했거든. 결국엔 읽기로 마음을 먹고, 단순히 메일주소를 잘못 쓴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말이야. 되게 짧으면서도 길고, 별 내용 없으면서 별 내용이 많은 메일이었지. 읽고 난 첫인상은, '굉장히 귀엽다.' 였어. 생일 선물 보내준다고 했으면서, 안 보내준 해외에 사는 아는 동생한테 선물 보내 달라고 찡찡거리는데, 어찌나 귀엽던지. 물론 그거 이외에도 다른 얘기들도 많았지만.
나는 그때 굉장히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어. 회사에서 큰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거든. 힐링이 필요했지. 며칠 동안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일만 했거든. 사소하더라도 힐링이 필요했어. 그래서 네가 보낸 메일이, 네가 더 귀여웠는지도 몰라. 한국어 실력이 많이 줄어든 터라, 메일의 모든 내용을 이해할 수는 없었었고 네가 떼를 쓰고 찡찡거리는 건 알 수 있었지. 굉장히 밝고 귀엽다고 생각했어. 메일만 읽었는데도 이렇게 읽는 사람을 미소 짓게 하는 사람이라니, 정말 밝은 사람이겠구나 라고도 생각했지. 나랑은, 같은 듯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아마 그래서 더 끌려서, 평소라면 절대 안 했을 미친 짓을 너한테 했는지도 몰라.
난 순전히 너랑 친해지고 싶었어. 읽기만 해도 밝아지는 편지를 쓰는 사람이랑 뭔가 연이 닿고 싶었지. 오랜만에 보는 한국어가 너무 반가워서 그랬을 수도 있고, 힐링이 필요해서 그랬을 수도 있어. 그치만, 그래도 그 마음보단 우진이 너랑 친해지고 싶었던 마음이 더 컸어. 그래서 그렇게 답장을 보냈지.
실수로 보내신 것 같다. 하지만 글을 읽고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이메일로 연락하며 지낼 수는 없을까. 라고 말이야. 지금 생각해도 오글거리고 부끄럽다. 그 때는 한국어도 엄청 서툴 때였는데 말이야. 더 예쁘고 정성 들여서 쓸 걸.
너는 몰랐겠지만, 나 그렇게 저녁에 보내고 나서, 자고 일어나서 아침에 엄청나게 후회했어. 왜 그랬을까, 미친놈이라 생각하지 않을까. 등등. 여러 생각을 했지. 네가 답장을 보내주기 전까지 말이야. 띠링- 하고 경쾌한 알람이 울리는데 보낸 사람이 어제 그 사람이야. 얼마나 놀랐는지.
「좋아요! 앞으로 잘 지내요!」 아직도 기억난다 네 답장. 그때는 우리 서로 존댓말을 했었는데. 짧지만 좋다는 답장이어서 엄청 마음이 놓이고 행복했었어 그 때.
그리고, 무슨 말로 이 인연을 시작해야 하나 하고 온종일 메일 생각만 했어. 덕분이 상사한테 엄청 깨진 날이기도 했지. 뭐 메일 생각 하느라 혼내는 내용이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지만.
고민 끝에 내 이야기는 하는 걸로 서툴게 첫 메일 보냈던 거, 기억나? 그때를 생각하면 한국어 실력 많이 늘은 것 같아. 그때는 무조건 번역기가 필수였는데, 지금은 사용 안 해도 충분히 편지 한 통 정도는 쓸 수 있어.
이렇게 인연이 된 건 처음이라 그런지, 너에 대해 평소보다 더 궁금증이 많아지고 호기심이 많이 생겼지. 어디에 살고, 무얼 좋아하고, 무엇에 관심이 있고, 그날 뭘 했는지. 전부 다. 그래서 그렇게 많이 물어봤던 것 같아 너한테. 그리고 너는 그거에 전부 다 응해주고, 또 덧붙여서 더 말해줬지. 재미있다 해야 하나 더 알고 싶다고 해야 하나. 원래 남의 세세한 모든 이야기를 그리 잘 듣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었는데, 네 이야기는 조금 다르더라고. 우진이 네 이야기라면, 아무리 사소한거여도 모든지 다 듣고 싶더라. 물론 지금도 말이야.
우진이 너는 내가 싱가포르에 산다고 하니깐 주로 한국에 관련된 내용으로 메일을 자주 써줬지. 네가 놀러 간 곳을 위주로. 놀러 간 곳 풍경 사진도 꼭꼭 찍어 설명까지 포함해서 보내줄 때마다, 정말 한국에 놀러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 원래도 한국에 관심이 있긴 했지만, 놀러 가고 싶다는 생각은 한 번도 없었거든? 근데 놀러 가고 싶더라 네가 보낸 사진들을 보다보면.
아 그래서 여행 자금을 모았어. 언젠가는 여행을 갈려고. 너랑 메일을 주고받게 된지 약 한 달 뒤부터 모으기 시작했으니깐, 10개월? 정도 됐네. 보면 놀랄 정도로 엄청 많이 모았어.
우리가 연락한지 슬슬 1년이 다 되어간다. 그리고, 그 말 다르게 말하면 너 생일이 곧 다가온다는 소리가 되잖아. 다가오면 올수록 몇 주 전부터 계속 고민했어. 뭘 해줘야하나.
그러다가, 문뜩 네가 저번에 해준 말이 떠올랐어. 나는 너에 비해 사진을 자주 안 보내잖아. 그래서 장난으로 네가 생일선물로 셀카 좀 잔뜩 찍어서 보내달라고 한 게 떠올랐어.
그래서, 그게 떠올라서, 한국에 가기로 마음먹었어. 애초에 한국 여행 계획하고 있었고, 돈도 충분하고, 말해줬다시피 회사 마음에 안 들어서 퇴사하려고도 했고. 딱 너무 적절하더라고 시기가. 그래서 그냥 가기로 했어. 재취업 전 힐링 여행도 겸사겸사 해서. 원래 이렇게 즉흥적으로 결정하는 사람이 아닌데, 조금은 나 자신한테 신기하더라.
조금은 이상하지? 음 그러니깐 나 셀카 못 찍거든. 그래서 그냥 실물을 보여주기로 마음 먹었다고 생각해줘. 생각해보면 그냥 생일 선물이 나인 거네.
한마디로, 너 덕분에, 우진이 너 보러 한국 가. 저. 처음에 말한 바쁜 일이 퇴사 겸 한국 여행 준비였어. 도착하자마자 부산 해운대로 갈 거야. 네가 가장 추천한 장소이기도 하고 너가 산다는 부산이라서 말이야. 만약 내가 준비 한 생일 선물이 마음에 든다면, 해운대로 와줘. 물론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오지 않아도 좋아. 선택은 우진이 네 몫이니깐.
난 그저 기다릴게. 거기에서. 우진이 너를.
(P.S. 검은 머리에 찢어진 검은색 바지. 회색 체크 재킷. 그리고 드롭이어링.)
*
「전송 중」
오타와 맞춤법을 확인하고는 그대로 전송 버튼을 눌렀다. 지금은 밤이니깐, 아마 아침에 일어나서 보거나 그렇겠지. 최대한 빨리 읽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이내 곧 욕심이란 걸 깨닫고는 고개를 저었다. 가기 하루 전 날이 급작스럽게 너 보러 한국 간다고 말한 것만 해도 충분히 이기적인데. 더 이상 바랄 수는 없었다. 사실 12시가 지났기에 따지고 보면 오늘이지만 말이다. 핸드폰을 비행기 모드로 바꾸며 시간을 확인했다. 10분 뒤면 출발이네. 몇 시간 뒤면 한국에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창문 밖에 보이는 풍경은 아직까지는 싱가포르인데 말이다. 사람 한 명 때문에 해외를 오기로 마음먹다니 참. 창문 밖 풍경을 바라보며 피식, 헛웃음을 지었다. 내가 생각해도 어이없고 즉흥적인 결정이었다. 자기 합리화일지는 모르겠지만, 나한테는 그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니 괜찮다고 생각했다. 정말로 '적어도 나한테는' 이지만 말이다.
언제부터인지는 기억이 안 난다. 낙엽이 언제 붉어지고, 언제 떨어지고, 언제 쌓이는지 눈치를 못 채는 것처럼, 똑같이 눈치를 채지 못했다. 다만 정신을 차려보니, 어마어마하게 쌓여 있는 것뿐이다. 아마 처음부터였을지도 모른다. 글만 읽고 귀엽다고 생각한 시점부터. 그 땐 내가 힘들어서 그저 힐링이 필요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 지금 또 생각해보니 그 때 반한 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유력한 원인은 서서히 마음이 쌓였다는 거지만 말이다. 어느샌가 눈치 챌 틈도 없이, 올라가기도 힘들 정도로 쌓여버린. 뭐 그런 거.
곧 이륙하니 벨트를 매라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정말 출발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벨트를 매곤, 가면서 잘려고 마음을 먹은 터라 안대를 쓰고 의자에 기대었다. 이대로 눈을 감았다가 뜨면 한국이겠지. 실제로 보는 한국은 어떨까. 자주 머릿 속에 한 번 생각해보았지만 한 번 더 생각해보았다. 사진과 실제는 다르다고, 우진이가 그랬는데. 얼마나 다를까. 우진이를 생각하니 기대감과 불안감이 동시에 생겼다. 기대감은 우진이가 나와줄까 하는 기대감이었고, 불안감은 똑같이 우진이가 나와줄까 하는 불안감이었다. 불안과 기대를 한꺼번에 담은 문장. 또 적어도 나한테는 이 문장이 유일할지도 모른다.
*
「전송 완료」
한국의 가을은 내 예상보다 훨씬 추웠다. 역시 상상과 현실의 거리는 멀다고. 내 상상보다 더 춥고 쌀쌀한 날씨였다. 비행기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부산으로 가는 동안 정말 춥다고만 생각했다. 혹시 내가 한국의 겨울은 11월부터 시작인데 12월로 착각하고 있는 거 아닌지 라고 생각도 해봤다. 분명 지금 한국은 가을인데. 왜 이리 겨울 같은지. 지금까지 한국에 대해 느낀 건 "춥다" 밖에 없는 것 같다. 풍경은 추워서 구경할 엄두도 내지 못하였다. 그나마 숙소로 들어오고 나서야, 창문을 통해 풍경을 구경할 수 있었다. 높은 건물도 많이 보였고, 작은 건물들도 보였다. 보다보니 싱가포르랑 비슷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다른 점은 분명이 있었다. 건물의 끝에는 해운대가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내가 묻는 숙소의 위치상 그렇게 보이는 걸 수도 있지만 말이다. 그래도, 우진이가 그렇게 추천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무어라 완벽하게 표현할 수는 없지만, 그냥 보고만 있어도 좋고, 뭐랄까 평온해졌다. 생각해보니 우진이 같기도 하네.
문득 시간이 궁금해져 핸드폰을 들었다. 아침 8시 즈음. 잠은 비행기에서 자서 그런지 딱히 오지 않았다. 지금부터 나가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다가도 슬며시 기대감과 불안감 찾아와 쉽사리 발걸음을 떼기가 어려웠다. …우진이가 정말 와줄까. 생각해보니 웃겼다. 내 멋대로 와달라고 하고, 또 선택은 너 마음대로 하고. 그러라고 했는데 정말 와줄까 라면서 걱정하는 꼴이라니. 오든 안 오든 그건 온전히 우진이 선택일 텐데.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이었나. 내가 생각해도 내 자신이 어이없어 나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생각을 마치고 나니 다리가 조금은 가벼워진 기분이었다. 가자. 우진이 만나러.
*
「수신 완료」
우진이가 가을 바다는 버틸 만 하다고 했는데. 밤이라 그런가, 추워 죽을 것만 같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벌써 밤 10시다. 먹거나 화장실 간 걸 제외하고는 하루 종일 해운대에 있었던 것 같다. 해운대는 유명해서 항상 사람이 많다고 했는데, 밤이 되니 해운대도 사람이 없는 건 매한가지였다. 대충 눈에 보이는 사람만 세보자면 10명 정도. 대부분 무리거나 커플이었다. 나처럼 혼자 덩그러니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그런가. 어째 더 추운 기분이었다.
결국 안 왔네. 꽤나 씁쓸했다. 예상을 못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실제로 이렇게 혼자 가을 바다 바람을 맞고 있자니… 생각보다 많이 춥다. 가을은 괜찮다고 하던대. 순전히 거짓말이었네. 이대로 굉장히 추운 계절로 남을 것 같은데.
*
「답장 작성 중」
돌아가자. 발걸음을 돌렸다. 나올 땐 꽤나 묵직했던 발이 지금은 왜이리 가벼운지 모르겠다. 한 걸음, 두 걸음, 그렇게 기대하고 불안해하던 해운대와 멀어진다.
"이 미친 인간아!"
손을 붙잡는 묵직한 힘, 그대로 몸이 돌려진다. 그리고 눈에 들어온다. 사진으로만 보던 아주 조금 밝은 갈색의 머리카락, 그리고 정수리. 힘든 듯 거친 숨을 내쉬며 숙이고 헉헉 거리는 등. 얼핏 보이는 불그스름하게 올라온 양 볼.
"해운,대가, 얼마나, 넓은데 거서, 찾으라 하면, 내가, 우째 찾으, 라고."
힘차게 올라오는 고개. 보이는 얼굴. 늘 사진으로만 보던 그 얼굴이다. 내가 몇 시간 동안 기다리던 그 얼굴.
"그리고 내가, 부산에 살긴 하지만, 해운대랑은 거리 있는 곳에 산다 말이다! 보자마자 바로 출발해서 그나마 지금 도… 왜, 왜 우는데."
그러게 왜 울까. 우진이 널 보면 기뻐서 웃음만 지을 것 같았는데. 웃음이 얼굴에서 안 사라질 줄 알았는데. 물론 기쁜 건 맞는데, 진짜 미친 듯이 기쁜데. 왜 울까. 왜 눈물이 날까.
"울지 마라… 왜 우는데. 힉, 얼굴 차가운 거 봐라. 얼음덩어리다 아주!"
따뜻하다. 눈물을 닦아주는 손이, 볼을 감싸주는 손바닥이, 따듯해 미칠 것 같다. 볼을 감싼 손 위로 내 손을 겹쳐 올려보았다. 따뜻하다. 내 손이 차가운 거였을까, 아님 우진이 손이 따뜻한 걸까. 아마 둘 다이지 않을까.
대체 몇 시간 동안 있었던 거냐면서 잔소리하면서도, 따뜻하게 얼굴과 손을 녹여준다. 그 위로 계속해서 내 손을 겹쳤다. 우진이 너는, 나한테 지금 네 손이 얼마나 따뜻하고 간절한지 모르겠지. 쫑알쫑알 얘기하는 네 모습이, 그냥 너 자체를 얼마나 필요로 했는지, 아마, 모르겠지.
"이렇게 하면 더 따뜻할 거다."
내 손을 잡아끌어 네 양 볼에 올리는 너를, 뛰어와서 몸에 열나서 따뜻할 거라고 말하는 너에게, 내가 무얼 말해줄려 했을까. 생일선물이라며 무작정 한국에 찾아와서 너를 기다리면서, 정작 너에게 해줄 말 한마디조차 난 생각하지도 않고 있었다. 그래도 최소한, 최소한 너에게 부담되지 않기 위해, 너는 어떨지 모르니깐, 내 마음을 표현하지 말자고 다짐 했는데.
"우진아."
"응?"
"좋아해. 많이."
못 참겠어. 네가 너무 따뜻해서.
*
「답장 작성 완료」
그렇게 뱉고는 한참을 우진이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그리고, 몇 분 정도 더 울었다. 너무 급작스럽게 감정을 다 쏟아버리느냐고 힘들어서 그런 걸 수도 있고, 우진이의 답장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 수도 있다. 단 하나 정확한 것은, 우진이는 내 고백을 듣고 한참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깨에 고개를 묻어버린 나의 안아주고 울음이 그칠 때까지 토닥여줬다는 것뿐이다. 이제 무슨 말을 할까. 침묵의 의미는 뭐였을까. 거절이었을까. 긍정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면 내 말을 이해 못한 것 일까. 차라리 거절이라면, 차라리 마지막 선택지가 가장 나을지도 모른다.
"다 울었나."
"…응."
눈물은 멈췄지만 쉽사리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사실 그냥, 이대로 계속 고개를 파묻고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지만 말이다. 고개를 들었다. 정확히는 고개를 올려버리는 우진이의 손길에 의해서. 내 양 볼을 감싸지고, 가만히 나를 바라보는 저 눈빛은, 과연 무슨 의미일까.
"생일선물로 왔다면서, 얼굴은 안보여주고. 이러면 메일이랑 뭐가 다른데."
"…그러게."
"글고, 생일선물이라 안했나. 내 생일선물인데 당연히 내꺼지."
쪽. 입술에 가볍게 붙었다가 떨어지는 말랑한 감촉. 놀라 바라보니 그저 해맑게 웃어버린다. 사진으로만 보았던 귀여운 덧니가 드러나는 해맑은 미소에 멍 때리며 쳐다보니 이렇게 말한다.
"뭘 당연한 걸 묻는데."
*
「답장 전송 완료」
보내는 사람 : WJ991102@email.com
받는 사람 : YM951225@email.com
2018. 12. 25. / PM. 11 : 02
자기한테 메일 오랜만에 쓰는 것 같다. 그 때, 자기가 내 생일선물로 한국 온 뒤에 연락하는 방식이 바뀌어서 메일은 한동안 안 써서 그런가. 어찌됐든, 이렇게 내가 오랜만에 자기한테 메일을 쓰는 이유는, 음… 내 생일 때의 소소한 복수랄까? 자기가 아무 말도 없다가 갑자기 당일에 나 한국 간다고, 해운대에서 기다라고 했잖아. 뭐 많이 말했지만, 그 때 내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지금 생각해도 너무 어이가 없다. 메일 보자마자 허겁지겁 달려간 것 때문에 아직도 놀림거리다. 그래서, 이번엔 자기가 한 번 당해보라고 ㅎㅎ
왜 생일선물 이야기 안하나 했지? 자기 생일선물은 싱가포르 가는 나야 ㅎㅎ 어때 대박이지. 장거리 연애 중인 애인이 직접 애인 보러 해외까지 가고. 뭐 물론 자기도 그 때 한국 왔지만, 그 때는 애인이 아니었으니깐.
뭐 어쨌든 나 지금 싱가포르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이륙 기다리면서 이 메일 쓰고 있어. 아마 보내고 나면 비행기가 이륙하겠지. 참고로 나 가자마자 마리나베이에 있을 거다. 어디 한 번 잘 찾아봐라. 그 넓은 곳에서 애인 찾기가 얼마나 힘든지 느껴봐라 한 번. 참고로 자기처럼 미련하게 같은 곳에서 열 몇 시간 동안 안 있을 테니깐 걱정 하지 말아. 옷도 잘 챙겨 입었으니깐. 그래도 빨리 와라. 예쁜 애인 혼자 마리나베이에서 싸돌아 댕기게 놔두다가 다른 남자한테 번호 따이는 거 보고 싶지 않으면. 사랑해. 그러니깐 빨리 와 자기야.
(P.S. 늦게 오면 올수록 각방 확률 높아지니깐 빨리 와야 해? ㅎㅎ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