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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우진아, ”

 뜨거운 입김이 바람과 함께 불었다. 아울러 입을 뗐던 나는 크게 벌렸던 입 사이로 느껴지는 차가운 공기에 입을 다물곤 동현이 형의 말을 경청했다. 아무리 겨울의 끝자락이라고 해도 아직 많이 추우니까 몸 조심하고, 혹시 보고 싶어지면 꼭 잊지 말고 연락해 주고. 그리고, 나한테 제일 중요한 거. 다른 인연이 생겨도 나 버리면 안 돼. 알았지? 본인만이 안심하기 위한 의도의 말이 연달아 이어졌다.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따쓰한 목폴라 티를 정돈해 올려주던 동현이 형은 크게 다짐한 모습처럼 애까지 써가며 억지 웃음을 지었고, 그때의 표정은 -지금에서야 설명할 수 없었을 만큼- 아주 가련했다.

 

 나 오늘 가, 형. 예상 밖으로 쉽게 떨어진 말은 가벼운 상태에서- 무거운 상태로, 단칼마냥 짧고 날카로웠던 상태에서- 또 점점 무뎌져 갔었다. “ 응, 잘 다녀와. 돌아오면 다시 거기서 만나는 거 잊지 말아 줘. 기다릴게. ” 분명, 심리를 몰라야 정상인 기계 덩어리 너머로는 무덤덤하지 않은 형이 있었다. 적어도 난, 어렵지 않게 그런 미래를 확신할 수 있었고. 대충 언제 쯤 돌아오니까 알겠다며, 귀찮은 대화를 하듯 대답을 얼버무렸다.

 

 

 

 

 

 

 

 

 

 

 

2.

 

 형은 말했었다. 나는 널 많이 좋아하는데, 그렇다고 반드시 네가 날 좋아해야 하는 건 아니라고. 처음엔 서로 좋아하는 것만이 진정한 사랑이라 느꼈다지만, 그렇다기엔 내 사랑은 인정받지 못 하는 것일까 생각해 봤다고. 이야기를 듣는 나는 솔직히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하나 드는 생각이 있었다면, 내가 뭐라고 이 형이 이렇게 노력할까 같은. 그리고 곧 잡힌 계획에 의도치 않게 -마치 돈을 빌렸던 것을 갚지 못해 도망가듯- 분위기가 형성되고 만 것이 문제가 된다.

 

 변명하고 싶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믿었던 나의 감정이 자꾸만 바뀌어 복잡해져 갈 때, 그때 아주 조금이라도 변명하고 싶었다. 숨김으로는 부족했다. 알고 있으나마나 다를 게 없어야 하는 사실에 이리저리 맞고 찍히는 기분이었다. 자존심이 상했으므로. 또, 반은 포기한 고백을 듣고도 아무렇지 않았던 그날 감정이 유지되길 바랐으니까.

 

 하지만 결과는 엉망진창이었다. 형의 곁을 떠난 것이 후회됐고, 떠나지 않았다면 더 후회됐을 거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한겨울의 후회. 그것은 내 인생을 크게 조각으로 나눈다면, 그 중 비율이 안 맞도록 클 조각 하나의 이름이 될 것이다. 익숙치 않은 비행기 안에서 날아가는 몇 시간 동안을 자지 못 하고 눈을 깜빡이는 기분을, 다시는 정돈하지 못 하는 목폴라 티를 창문에 비치는 모습으로 간간히 보게 될 때의 기분을 고칠 수도 없고. 잦은 연락이 힘든 다른 나라에서 3년을 살게 됐다. 서로가 서로를 잊고 싶어 안달하는, 그런 한겨울의 후회.

 

 

 

 

 

 

 

 

 

3.

 

 지역도 아닌 나라까지 다른 곳으로 간 이유는 간단했다. 학업에 집중해야 했던 시기였으니까. 늦지 않은 나이는 내 멋대로 행동해서는 안 됨을 암묵적으로 강요했고, 부모님은 나의 사정이 하나 없음을 예상했나 보다. 그냥 얘기를 듣고 움직이는 것으로, 나도 그게 이득일 거란 생각만 했는데.

 

 틀렸다. 동현이 형이 그리웠다. 항상 있던 것의 소중함이 이렇게 중요할 줄은 몰랐다. 대충 스치는 교과서의 예문에 자주 등장하는 말로, 지금은 지겨운 것도 언젠간 사라질 것이라 생각하며 항상 고마워해야 한다고 했던가. 그 말을 이제야 대충이나마 알겠어서. 한 사람을 떠올리는 것으로 이렇게까지 힘들었던 적이 있던가 싶었다. 그러나, 곧 설렘이라고는 보기 힘든 이 기분을 너무 빨리 느낀 것이 나의 잘못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곧 내 머릿속을 지배하고 말았다. 이 3년의 목적은 행복하고, 신기함을 느끼고, 성장해가야 할 시간이었으나. 나에겐 지옥 같고, 성장을 할 수 없게 자꾸만 괴롭힘을 받게 되는 시간이었다. 하나 긍정적인 면이 있다면, 이해 못 하던 예문에 깨달음을 얻을 것이 다겠지. 뒤늦게 해 봐야 소용없는 후회를 가득 삼키고 내려 생활한 이곳에선 특별한 교훈 하나 없었다.

 

 

 

 

 

 

 

 

 

4.

 

 ‘고객님께서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삐 소리 이후 음성 사서함으로 연…,’

 

 보고 싶어.

 

 

 

 

 

 

 

 

 

5.

 

“ 우진, 갈 준비를 하도록 해. 너의 부모님께서 부른다. ”

 

“ 아, 네. ”

 

 신세 많이 졌어요, 감사합니다. 이젠 한국말을 다 익숙하단 듯이 해오시는 집 주인분과 악수를 나누었다. 그래도 뭐, 아직은 신세를 많이 졌다느니 하는 어려운 말은 모르시는 것 같았지만. 대충의 인사라는 걸 아셨는지 고개를 얕게 끄덕이신다. -더는 볼 일 없을 거라 생각한- 방의 문을 꽉 닫고, 무거운 가방과 꽉 찬 캐리어를 끌고 밖으로 향한다. 이른 시간의 날씨는 아주 밝았고, 걸어가면서 하늘도 보고, 구름에 이름을 붙여주고. 가족들을 다시 볼 생각에 마냥 기쁘게 차오를 때-

 

 

 

 

 

아,

 

 

 

 

 

6.

 

 내가 누군가 잊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걸 기억해냈다. 빨라진 발걸음은 시간이 빠르기 가길 재촉하듯 움직였고, 익숙함 속의 그리움을 뒤늦게라도 되찾기 위해서는 뭐든지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단 조금의 포기도 없어 잠은 오지 않았다. 또, 비교하자면 올 때와 느낌은 달랐다. 그때는 적어도 마음속에 알 수 없는 압정이 박힌듯 괴로울 정도는 아니었다. 어딘가 모르게 의혹에 가득찬 감정이 압박해 왔을 뿐, 그의 형체도 알기 힘들 만큼 아무것도 아닐 거라 생각했다. 이젠 그 감정이 내 목을 조르듯 다가왔지만 말이다. 어떻게 되든 좋으니까, 볼 수 있으면 해서. 이런 내 자신이 어쩌다 이렇게 됐냐고 물어본다면, 나조차 모르는 이유라 괜히 민망할 것 같아서. 먼저 만나자고 연락할 수 없었다. 잊으면 안 되는 사람을 자각한 출발 전에도, 가는 중에도, 도착 후에도. 손은 자꾸만 연락처를 누르는데, 뒤로가기를 연타하는 손가락은 또 내 의지로 움직이니. 한 새벽에 도착했는데 집에 못 들어갈 것 같은 기분이라, 집에서도 그 사람의 이름만 부를까 봐. 끝내 눈물을 삼키지 못하고 밖으로 줄줄 흘리며 헤어질 때 전화로 인사를 건넸던 그 장소에서, 그 계절에서 너를 부르고 있다.

 

 

 

 

 

 

 

7.

 

 설마 받을 줄은 몰랐는데. 차라리 받지 마라, 자고 있어서 못 받아서, 일어나서는 기록을 보며 내가 기억해서 전화했다고만 생각해 줘라.-와 같은 생각으로 듣기 싫은 음을 계속해 이어 듣는 중이었다. 어차피 그렇게 생각 안 해도 받지 않을 거라 예상해 금방 끊으려는데, 익숙하지 않은 수신음이 달칵 들리는 순간에는 가슴이 저 밑으로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덜덜 떨어 흔들리는 손은 금방이라도 휴대폰을 놓칠 것만 같았고, 진정되지 않던 숨소리는…

 

“ 여, 여보세요? ”

 

“ 누구세요? ”

 

 다른 목소리에 먹여삼켜져버렸다.

 

 

 

 

 

 

 

8.

 

 허무했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사라진 듯, 짧은 시간 내에 공존했던 모든 감정들이 기쁘고 두려움을 나타내다가 결국 지워냈다.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처음 듣는 목소리에, 혹시 가족이 아닐까 하고 꺼내기 힘들었던 그 이름 세 글자를 중얼였으나 잘못 거신 것 같다며 그 전화는 아무 의미도 남기지 않고 끊겨졌다. 그냥 아쉬운 게 다면 좋을 텐데, 마음이 괜히 답답해졌다가 점점 울 것 같았다. 아니, 울었다. 내가 아무렇지 않게 무시해왔고, 무시하려던 사람이 다른 감정으로써 내 마음에 남고 계속 기억해냈을 때마다 자신에게 느낀 감정과는 또 달랐다. 더 고통스럽고, 미칠 것 같았다. 이 날을 위해 살았으나, 알고 보니 빛이 아닌 백지였으니까.

 

 그 누구도 없는, 나 혼자만이 남겨진 자리에. 그 혼자만이 오기를 바라며.

 

 

 

 

 

 

 

 

 

9.

 

“ 저기, 혹시. ”

 

 응?

 

“ … 우진이, 맞지. ”

 

 뭐야?

 

“ 미안해, 오늘을 기다린다는 게 오늘을 망쳐버렸어. ”

 

 꿈...인가?

 

“ 어떻게 사과해야 좋을까... 정말로 이 시간까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는, ”

 

…데... 따뜻한 온도가 추운 겨울 사이로 느껴진다. 꿈이 아니라면, 만약 이게 꿈이 아니라면 증명하고 싶었다. 너 깨 있었구나. 익숙한 말투로 사소한 말을 툭 내뱉는 그가 갑작스러운 포옹임에도 불구하고 내 품을 꽤 꽉 안아준다. 그. 내가 찾던 그 동현이 형이 살포시 웃는다. 갑작스레 내리는 눈이 머리와 어깨에 닿아 차가운데도, 팔을 놓고 싶지 않았다. 이 느낌이, 너무 따뜻하고 기분 좋아서. 그동안의 시간이 없던 일마냥 녹아내리지만, 남아 있는. 설명해 주지 않아도 닿는 느낌. 몇 분간 포옹 상태를 바꾸지 않던 우리는 자연스럽게 서로를 눈치채고, 그만 물러서며 손을 잡았다. 자연스럽게 들어오는 깍지가 간지럽고, 나에겐 없던 형만의 온기가 전달돼 느껴졌다.

 

“ 기억해 줘서 고마워. ”

 

“ 저야말로요. …사실은 기다리면서 형이 여길 안 오실까, 하고... 잊으셨을...까 봐, 조마조마했거든요. ”

 

“ 괜한 걱정을 했네, 우리 우진이가. ”

 

“ 네에? ”

 

“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장소는 평생 못 잊을 거야. ”

 

“ 왜, 왜요? ”

 

 

 

 예전부터 계획하고 있었거든. 네가 돌아오는 날에는, 반드시 고백을 할 거라고.

 

……

 

 좋아해. 사귀자, 우진아.

 

 

 

 

 

 

 

 

 

10.

 

 기대하던 한마디에 예상하지도 못한 울음이 쏟아진다. 이상하게 형을 따라 걷는 발걸음도 멈추지 않고, 눈물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의 눈에서 또 한 번 눈물이 격하게 몰아쳤다가, 힘없이 아래를 향해 톡 톡 떨어진다. 눈물마저 차갑던 아까와는 달리 살짝 쌓여 있던 눈을 녹일 따뜻한 눈물이 그치질 않는다. 동현이 형의 당황한 얼굴이 잠깐 보였다가 사라지니까, 더 눈이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민망하고, 기분 나쁘고, 싫은데 또. 벅차고, 기분 좋고, 기뻤다. 큰 주변 소리보다 더 클 것 같은 내 우는 소리가 웃는 건지 착각될 만큼이나 흑끅대는 숨소리를 하염없이 삼켰다가 내뱉는다.

 

“ ... 형은, 왜, 연락하라는 것도, 오는 날에 여기로 나와서 보자는 것도, 다 안 해 주고 있었다가, 이제서야 나와요. 그래놓고, 왜 제 마음을 복잡하게 만드시는, 거예요. 네에? 왜. 대체, 무슨, 이유로오… 제가 뭐를, 잘못했다고오. ”

 

“ 저기, 우진아... 그만 울어. 미안. ”

 

“ 그 말만, 하면 다예요?, 진짜. 사람 죽이고, 미안하다고 하나, 말할 거예요? ”

 

“ 아니야, 제발 우진아. 일단은 그치자. 응? 방금 우리 사람 많은 곳 왔는데... 다 쳐다보잖아. ”

 

“ 그래요, 안 울게. 안 울면 되잖아. 형은, 내가 부끄럽지? 민망하고? 그런 거죠? 흐엉엉엉……, ”

 

 

 

 

 

 

 

 

 

11.

 

 무작정 엄청 운 것만 기억에 가장 크게 남은 채, 낯익은 집에서 팅팅 부은 눈을 비비며 일어나게 됐다. 꿈인가, 그것마저 꿈인가. 내 기억엔 너무 비참했어서, 꿈이었던 건가 싶어 휴대폰을 들어 검색하려는데… 그럴 필요가 사라졌다.

 

“ 일어났어, 우진아? ”

 

“ 아, 깜짝아. 네. 일어났긴 한데... 맞다 맞다, 형 집이었구나. ”

 

“ 어제 너, 그 유명한 선물 가게에서 큰 소리로 울어버려서. ”

 

“ 설, 설마 여기 앞이요? ”

 

“ 으응. 그래서 급한대로 너 먼저 재우러 우리 집에 먼저 들어오게 해주고,... 자. ”

 

 이제 곧 생일이잖아. 선물 사 왔어.

 

 

 

 

 

“ 헐, 대박... ”

 

 

 

 

 

 

 

12.

 

 우리 헤어진 지 몇 년이나 지났었죠. 기억도 안 나는데, 어떻게 제 생일도 기억해 주셨을까. 게다가 이거 갖고 싶은 건담이었는데... 감사해요.

 

 … 이상하게 형 앞에서만 울게 돼서 또 그칠 겸 잠을 잤다. 일어나서 남긴 편지 하나. 서툰 글씨로 힘겹게 고마움을 전하는 편지. 문틈 사이로 몰래 보는 편지 읽는 동현이 형. 잘 전달이 안 됐는지 웃고 있지만, 조금 화나지만... 그래도 이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좋다.

 

 

 

 추운 겨울, 하지만 춥지 않은 겨울.

 

 미운 그 사람, 하지만 아껴주고 싶은 그 사람.

 

 따뜻한 그 사람.

 

 … 덕에, 춥지 않은 겨울이다! 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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