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실은, 형을 많이 좋아했습니다.
첫 문장이 이래서 죄송합니다. 그래도 형에게 하고 싶은 얘기를 담았으니 들어주세요. 사실은 꽤 어릴 적부터 형을 좋아했습니다. 제 옆에서 웃는 형을 보면 저도 모르게 가슴이 떨리고 했었습니다. 형이 이제 조금 있으면 저를 두고 어딘가로 영영 가야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편지를 쓰려고, 모처럼 편지를 쓰는 김에 제 기분을 전해보자고 생각해봤습니다. 그냥 그것뿐입니다. 형, 어딘지는 모르지만 거기에 가서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된다면 언젠가는 만나고 싶어요.
박우진.
고요한 비행기 안에서 읽은 마지막 편지는 왠지 모르게 싫었다. 그 애 답지 않은 어른스러운 말투가 눈에 거슬렸다. 하지만 그 아이가 이렇게까지 어른스럽게 지내게 된 이유는 황민현 그 자신이기에 그는 거슬림과 죄책감 말고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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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센티넬 협회. 황민현이 소속 되어있었던 곳이자 박우진이 소속된, 정부 소속의 센티넬 관련 기관. 전국에서 1년에 두세명 발현할까 말까인 센티넬들을 모아놓고 그 소년들의 교육, 양육권을 도맡는 기관이다. (센티넬의 약 99.3%는 11세에서 16살 청소년에게 발현된다.)
황민현은 센티넬들의 교육을 담당하는 사람이었다. 그곳은 또 한번 진급반과 교육반으로 나누어져서, 군인같은 전투나 싸움을 본업으로 하는 직업을 가질 센티넬들은 진급반에서 실전 훈련을 받아왔고 그러지 않을 센티넬들은 몸에서 발현되었던 발현 세포를 죽여나가면서 보통 아이들과 같이 정규 수업을 받는다.
라고 하는 건, 어디서나 센티넬들의 인권 유린 혹은 센티넬의 교육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하라는 사람들에 대항하기 위해 세간에 알려져 있는 뻔한 내용일 뿐이다. 어딘가의 중학교에서나 외우고 있을 내용이다. 실제로는 반 따위 나누어있지 않다. 실전 훈련이 80% 정규 수업이 20% 언저리 될 뿐이다.
그러니 기관에서 가장 푸대접을 받는 사람은 교육 담당의 황민현일게 뻔했다. 실제로 황민현은 학생들에게는 인기가 많아도 다른 직원들에게는 눈엣가시인 존재일 뿐이었다. 그런 황민현을 제일 좋아하는 학생이 있었는데, 그 아이는 활발한 남자아이였다.
그 아이는 그 드물다는, 세대에 한 명 태어날까 말까인 SS급 센티넬이었다. 그 아이에 한정되어 정규수업은 편성되지 않았다. 그러니 원래대로라면 그 아이와 황민현은 모르는 사이여도 이상하지 않았다는 거다.
근데 그 아이는 황민현을 하루 종일 따라다녔다. 왜냐면, 그 아이에게 있어서 처음은 모두 황민현이었기 때문이다. 첫 만남은 폭설이 오던 겨울 날. 이미 몇 명의 사람들이 폭설에 휘말려 부상을 입었다는 뉴스가 티비 저편에선 흘러나오고 있던 날. 원래 첫 센티넬을 데려오는 일은 폭주의 가능성이 있어 높은 등급의 센티넬이나 베테랑 기관 직원이 했지만 폭설은 매정하게도 황민현을 선택했다.
서둘러 차를 타고 도착한 좁은 동네는 이미 초토화가 되어있었다. 그 사이에서 이미 성인 쯤으로 보이는 아이... 소년. 소년... 아니 그 남자. 그 남자는 반팔 반바지에 맨발 맨손으로 이미 눈으로 뒤덮힌 집의 파편에 쓰러져있었다. 황민현은 제 눈을 의심했다. SS등급은 특별한 케이스에서 더 잘 나타난다는 외국의 논문을 읽은 적은 있지만 그것이, 그것도 세계에서 몇 없어 연구 결과도 몇 없는 센티넬이 지금 내 앞에서, 쓰러져있다.
0.7%, 그 안에서 더 희귀한 SS급이 나타날 확률은... 황민현은 생각을 하다가 멈추었다. 저 남자를 센터로 데려가는 게 먼저였다. 이미 마을은... 더 이상 마을이 아니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형체가 남아있지 않았기에, 양육권은 쉽게 받을 수 있겠네 싶어서 그 상태로 그 남자만 들고 기관으로 돌아왔다.
기관에서 여유있게 보니까 성인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앳된 얼굴이었다. 반에 한 두명 있는 체육 잘 하는 큰 남자애 포지션... 같은 쓸데없는 생각을 황민현이 하고 있을 때 아이는 눈을 떴다.
‘형. 나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
라고 그 아이가 말했을 때, 황민현이 그 아이를 센터에 데려와 그곳은 그 아이의 새로운 기억이 되었고
‘나 내 이름도 모르겠어’
라고 그 아이가 말했을 때, 황민현이 박우진이라고 하자 그 아이는 그 때부터 박우진이 되었다.
황민현은 박우진이 여린 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자신과는 다르게 너무 우월한 존재라고 생각해서 그에게 가기를 꺼려했다. 그가 다른 센티넬 아이들에게 친절할 수 있던 이유는, 황민현은 무엇을 해도 실전수업만은 보지 않으려고 했다. 그들도 자신과 같은 평범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박우진은 황민현을 제일 의지했지만 황민현은 박우진을 제일 피하며 다녔다. 황민현은 박우진의 기분 같은 건 생각해본 적도 없지만, 아마 박우진은 몇 밤을 눈물로 지새웠을지도 모른다. 박우진은 센터 내에서 가잘 여리고 부드러운 성격이었으니까. 그런 박우진도 어느 날을 기점으로 사람이 180도 바뀌었는데. 그 날도 폭설주의보가 전국 단위로 내려진 날이었다. 그 날은 박우진이 황민현에 의해 센터로 데려와진 날로부터 꼭 3년 째 되던 날이었는데, 황민현은 차분한 쪽의 박우진을 더 싫어했다. 박우진은 아는지 모르는지. 직원들은 두려움에 떨었지만 말이다. (박우진이 지금 와서 나쁜 쪽으로 길을 들이면 아무도 막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하기 때문에)
그러다가 황민현이 발령이 났다. 박우진도 이제 20세가 넘어가는 시기에 황민현은 20대의 끝을 슬슬 보이고 있었으니 이런 편하고 좋은 직업을 원하는 황민현보다 젊고 똑똑한 20대 청년들이 없을 수 없었다. 황민현도 그 때 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거다. 어딘가 외국에 가서 편히 살고 그대로 살다 죽으면 편한 삶이라고 직원들은 귀가 닳도록 들었으니 말이다. 황민현은 철저한 자기중심주의다, 라는 말이 한 때 직원들 사이에서 돌았다.
그렇게 황민현은 아무도 모르는 해외로 가게 된 건데, 직원들과 학생들은 마지막 선물이라며 편지를 한 뭉텅이 황민현에게 주었다. 아무리 눈엣가시여도 정은 드는 법인가보다.
박우진의 편지지는 어울리지 않게 크리스마스였다. 더워 죽을 것 같았던 황민현은 코웃음을 치며 편지지를 열었다. 박우진 답지 않은 어른스러운 말투가 눈에 거슬렸다. 하지만 박우진이 이렇게까지 어른스럽게 지내게 된 이유는 황민현 그 자신이기에 그는 거슬림과 죄책감 말고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박우진에게 있어서 황민현은 눈이 내리던 추운 날의 한겨울이었다.